민주노동당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하는 순간, 사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민주노동당은 어쩌면 나에게 큰 의미를 지닌 곳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치적인 의미를 떠나서 나에게 큰 의미를 지닌 곳이 "맞다".
처음 소위 말하는 "활동판"이라는 것에 들어가게 된 것이 민주노동당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놀고 있었던 때였고, 때마침 올라온 성소수자위원회 상근자 공고에 떡하니 눈이 홀린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름 몇대 몇의 경쟁률을 뚫고 이름만 들어본 '민주노동당' 그것도 '중앙당'의 일원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걱정이 대단했다. 나의 정치적 성향에 맞는지를 다시 묻는 사람도 있었고, 절대 데모는 하면 안된다고 못을 박던 외할머니도 있었다.그렇게 난 당의 색깔이나 정책하나도 나는 모르고 당에 입당을 하게되었다. 그저 '성소수자로서 행복하고 싶어서'였다.
행복하고 싶어서 시작했고,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미련없이 당을 떠나왔다.
많은 일을 겪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내 인생에 중요한 인물이 되고 있는, 그리고 될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해준곳이 성소수자위원회였다.
정치판이라는 곳에 관심을 갖게 해준 곳도 민노당이었고, 정치판이 더럽다고 생각하게 해준곳도 민노당이었다.
어쩌면, 이건 '당'을 생각하지 못하고 '위원회'만을 먼저 생각했던 내 문제가 더 큰것일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싸우는 모습을 봐야했고, 불합리한 구조에 '할 수 없이' 승복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봐야 했으며, 하고싶지 않은 일들도, 동의하지 못하겠는 일들도 '당직자'였기 때문에 해야만 했다.
2006년 7월에 시작한 나의 성소수자위원회 생활은 1년을 채 못채우고 2007년 4월에 끝이 났다.
어떤 한가지 이유때문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이 문제였는지, 위원회가 문제였는지, 사람들과의 관계가 문제였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온 후,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나를 키워준 곳일 수도 있는 성소수자위원회에도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만큼 난 1년여만에 지쳐있었다. 공동연대라고 만들어진 테이블에 이름만 걸어놓고 나몰라라 하는 사람들에도 질렸었고, 정치인이라고 얼굴마담 몇번 한것으로 생색내는 의원들한테도 질려있었고, 허구헌날 싸움질에 뒷다마질인 파벌을 보는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당직자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여러가지 일들. 지금보다 더 미숙했던 내가 감당해낼 수 없었던 권위적인 감정의 폭력들. 계속해서 밀리는 월급과, 카드 돌려막기로 어떻게든 버텨내보려고 애를 쓰던 다른 당직자들도, 그리고 그걸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고 말하던 무책임한 사람들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떠나온 후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다른 거처를 찾았고, 선거철을 맞으면서 조금씩 당을, 성소수자위원회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견뎌낼 수 없었던 것들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불합리에 견디지 못하고 당을 그만둔 사람들, 혹은 다른 당을 만들어간 사람들. 그들도 각자 행복을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해 가고 있는 것을 이제는 볼 수 있다.
내가 옳았느냐라고 묻는다면, 틀리진 않았다고 말을 할게다. 나도, 행복하고 싶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어디든 누구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는, 어디도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은 떨어진 시선으로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정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뭔가 센치해진 밤. 과거를 돌아보다.
처음 소위 말하는 "활동판"이라는 것에 들어가게 된 것이 민주노동당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놀고 있었던 때였고, 때마침 올라온 성소수자위원회 상근자 공고에 떡하니 눈이 홀린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름 몇대 몇의 경쟁률을 뚫고 이름만 들어본 '민주노동당' 그것도 '중앙당'의 일원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걱정이 대단했다. 나의 정치적 성향에 맞는지를 다시 묻는 사람도 있었고, 절대 데모는 하면 안된다고 못을 박던 외할머니도 있었다.그렇게 난 당의 색깔이나 정책하나도 나는 모르고 당에 입당을 하게되었다. 그저 '성소수자로서 행복하고 싶어서'였다.
행복하고 싶어서 시작했고,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미련없이 당을 떠나왔다.
많은 일을 겪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내 인생에 중요한 인물이 되고 있는, 그리고 될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해준곳이 성소수자위원회였다.
정치판이라는 곳에 관심을 갖게 해준 곳도 민노당이었고, 정치판이 더럽다고 생각하게 해준곳도 민노당이었다.
어쩌면, 이건 '당'을 생각하지 못하고 '위원회'만을 먼저 생각했던 내 문제가 더 큰것일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싸우는 모습을 봐야했고, 불합리한 구조에 '할 수 없이' 승복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봐야 했으며, 하고싶지 않은 일들도, 동의하지 못하겠는 일들도 '당직자'였기 때문에 해야만 했다.
2006년 7월에 시작한 나의 성소수자위원회 생활은 1년을 채 못채우고 2007년 4월에 끝이 났다.
어떤 한가지 이유때문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이 문제였는지, 위원회가 문제였는지, 사람들과의 관계가 문제였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온 후,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나를 키워준 곳일 수도 있는 성소수자위원회에도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만큼 난 1년여만에 지쳐있었다. 공동연대라고 만들어진 테이블에 이름만 걸어놓고 나몰라라 하는 사람들에도 질렸었고, 정치인이라고 얼굴마담 몇번 한것으로 생색내는 의원들한테도 질려있었고, 허구헌날 싸움질에 뒷다마질인 파벌을 보는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당직자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여러가지 일들. 지금보다 더 미숙했던 내가 감당해낼 수 없었던 권위적인 감정의 폭력들. 계속해서 밀리는 월급과, 카드 돌려막기로 어떻게든 버텨내보려고 애를 쓰던 다른 당직자들도, 그리고 그걸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고 말하던 무책임한 사람들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떠나온 후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다른 거처를 찾았고, 선거철을 맞으면서 조금씩 당을, 성소수자위원회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견뎌낼 수 없었던 것들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불합리에 견디지 못하고 당을 그만둔 사람들, 혹은 다른 당을 만들어간 사람들. 그들도 각자 행복을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해 가고 있는 것을 이제는 볼 수 있다.
내가 옳았느냐라고 묻는다면, 틀리진 않았다고 말을 할게다. 나도, 행복하고 싶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어디든 누구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는, 어디도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은 떨어진 시선으로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정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뭔가 센치해진 밤. 과거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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