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갈지도 모르는 태생적 트라우마.
난 5월에 잉태된 아이이다.
난, 80년 5월에 잉태된 아아이고,
난, 80년 5월에 광주에서 잉태된 아이이다.
어떤 이에게 이 일은 별 것이 아닐 것이지만,
나에게 이 작은 태생의 사건은 평생을 가지고 가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아빠는 그 당시 대학생이었다. 얼핏 들은 말에 의하면, 대학생은 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아빠는 엄마와 함께 결혼식 사진을 들고 길을 걸었고, 결국은 운영하던 가게에 숨어 계셨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 부모님은 살아남은 사람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자들보다 많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처음에 접했던 90년대 초반의 집회. 최루탄 내음 가득한 거리와 거리 가득한 사람들. 누가 시민이고 누가 대학생이었는지, 사실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빠의 나에 대한 첫번째 요구는 "대학에 가면 절대 술.담배.운동을 하지 말것"이었다. 나는, 이 요구를 중학교때 전해들었다.
대학에 들어간 첫해, 선배는 소위 빨간책이라 불리우는 것을 빌려준다. 난, 그 책을 읽지도 못했다.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그 제목의 책을 보자마자 아빠는 내 눈앞에서 책을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그게, 부모님의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처음 5.18을 접했을 때가 아마 중학교때였을게다. 글짓기 대회를 하러 묘역에 갔고, 처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도, 기억도 희미하지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여전하다.
고등학교때는 5.18 일일 체험학교에 갔었다. 그때도 난 울었던가...
고등학교때 5.18은 그냥 하나의 행사였다. 시에서는 80년 5월 18일에 태어난 학생들에겐 장학금을 주었다. 죽지 않고 태어나준것이 감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이후, 5.18은 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어가 되기 시작했다.
개뿔 5.18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도, 나는 광주 사람이고 80년에 잉태된. 그 총소리 속에서 잉태된 아이였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엔,
난 항상 마음속 가득 납덩어리를 안고 산다.
난, 기억해야 하고
난, 잊지 말아야 하고
난, 이야기 해야 한다.
난, 광주의 아이이다.
5월만 되면, 마음이 너무 무겁다.
모든 도시가 공감하고 있었기에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시절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5월을 잊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5월은 "우리의 5월"이지 않았기 때문일테다.
우리의 5월은 매년 다가오고,
각자는 그 트라우마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간다.
어떻게든....살아간다.
난 5월에 잉태된 아이이다.
난, 80년 5월에 잉태된 아아이고,
난, 80년 5월에 광주에서 잉태된 아이이다.
어떤 이에게 이 일은 별 것이 아닐 것이지만,
나에게 이 작은 태생의 사건은 평생을 가지고 가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아빠는 그 당시 대학생이었다. 얼핏 들은 말에 의하면, 대학생은 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아빠는 엄마와 함께 결혼식 사진을 들고 길을 걸었고, 결국은 운영하던 가게에 숨어 계셨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 부모님은 살아남은 사람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자들보다 많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처음에 접했던 90년대 초반의 집회. 최루탄 내음 가득한 거리와 거리 가득한 사람들. 누가 시민이고 누가 대학생이었는지, 사실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빠의 나에 대한 첫번째 요구는 "대학에 가면 절대 술.담배.운동을 하지 말것"이었다. 나는, 이 요구를 중학교때 전해들었다.
대학에 들어간 첫해, 선배는 소위 빨간책이라 불리우는 것을 빌려준다. 난, 그 책을 읽지도 못했다.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그 제목의 책을 보자마자 아빠는 내 눈앞에서 책을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그게, 부모님의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처음 5.18을 접했을 때가 아마 중학교때였을게다. 글짓기 대회를 하러 묘역에 갔고, 처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도, 기억도 희미하지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여전하다.
고등학교때는 5.18 일일 체험학교에 갔었다. 그때도 난 울었던가...
고등학교때 5.18은 그냥 하나의 행사였다. 시에서는 80년 5월 18일에 태어난 학생들에겐 장학금을 주었다. 죽지 않고 태어나준것이 감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이후, 5.18은 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어가 되기 시작했다.
개뿔 5.18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도, 나는 광주 사람이고 80년에 잉태된. 그 총소리 속에서 잉태된 아이였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엔,
난 항상 마음속 가득 납덩어리를 안고 산다.
난, 기억해야 하고
난, 잊지 말아야 하고
난, 이야기 해야 한다.
난, 광주의 아이이다.
5월만 되면, 마음이 너무 무겁다.
모든 도시가 공감하고 있었기에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시절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5월을 잊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5월은 "우리의 5월"이지 않았기 때문일테다.
우리의 5월은 매년 다가오고,
각자는 그 트라우마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간다.
어떻게든....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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