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지의 인권이야기] 트랜스젠더에게 '1'과 '2'의 차이
한무지
한무지
<출처; berlin.cls.yale.edu>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입니다.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른 채 힘없이 의자에 걸터앉습니다.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면서 어지러운 머리를 몇 번 도리질 치다가, 한번 부딪쳐 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여지없이 다가온 월요일, 그/녀는 준비된 서류를 들고 당당히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서류를 제출하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바삐 검토하는 회사 관계자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러나 결국 올 것이 오고 맙니다.
“엇? OOO씨, 남자/여자였어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물어보면 뭐라뭐라 대답해야지 하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지만, 과부화 걸린 컴퓨터처럼 ‘버벅’거리기만 하고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으며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트랜스젠더입니다. 트랜스젠더는 정신적 성과 육체적 성이 일치하지 않…….”
회사 관계자는 어느새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계세요. 추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별 수 없습니다. 돌아가야죠. 별다른 말 한번 해보지 못하고 ‘알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래도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적어도 그 사람은 그/녀에게 정신병원에 가라느니, 더럽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그 회사에서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호적의 힘?
대한민국 '국민'으로 등록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주민등록번호와 호적을 갖게 된다.<출처; www.eastern.or.kr>
이 번호의 힘은 실로 막강합니다. 사회 속속들이 침투해 생활의 아주 밀접한 부분까지 관여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깝게는 친구들끼리 나이를 운운하며, 내가 더 많네 네가 더 많네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민증 까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술집에서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나이를 확인받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주민등록증을 제시합니다. 그 외에도 핸드폰을 개통할 때에나, 은행 통장을 만들 때, 수표를 제시할 때, 집을 계약할 때, 병원에 갈 때, 법률행위를 할 때, 불심검문을 받을 때 등등 수많은 공간과 상황에서 신분증을 통해 신분 확인을 ‘당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하게 됩니다. 취직을 하기 위해선 신분증뿐만 아니라 주민등록등·초본에 통장사본, 심지어 호적등본까지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는 신분증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문화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확연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트랜스젠더 호적 문제
애꿎게도 주민등록번호는 생각보다 많은 개인정보를 제공합니다.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기본적인 생년월일과 이분법적인 성별, 심지어는 태어난 지역까지 알 수 있습니다. 트랜스젠더들은 이 중에서도 특히 성별을 ‘2’와 ‘1’로 가르고 있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번째 숫자에서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일정 정도 치료가 진행된 트랜스젠더라면 당연히 호적상의 성별과 드러나 보이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으니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배제되기 마련이지요. 그 과정에서 느껴야하는 모멸감과 불편함, 불쾌감, 당혹스러움은 물론 실질적인 차별을 당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트랜스젠더들의 ‘취직’ 자체가 워낙 힘들다 보니 생계 문제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렇다 보니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는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다반사고, 노동 도중에 사고를 당해도 보상은커녕 치료비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생계는 더욱 어려워지고 피할 수 없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멀고도 험난한 호적정정의 길
트랜스젠더들에게 호적이란 그들을 옥죄는 올가미와도 같습니다. 전국민에게 일련번호를 매기는 지금과 같은 주민등록제도가 없어져서 호적이니 뭐니 신경 안 쓰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가도 된다면 그게 가장 좋겠지만, 현실은 또 그렇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 호적정정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은 바꾸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수술을 진행 중이거나 끝마친 트랜스젠더들은 호적정정을 위해 발 벗고 나섭니다.
사실 알고 보면 호적정정의 법률적인 절차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호적정정신청서를 작성한 후, 주변인의 ‘인우보증서’(보통 그 사람이 남성/여성으로서 성공적으로 살아왔다는 서술이 들어갑니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과 정신과진단서, 수술증명서 등을 첨부하여 관할 지방법원에 제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관련 정보를 제공해주는 곳이 없을 뿐더러 법률행위 자체에 대한 부담과 그 절차상의 어려움 때문에 보통은 변호사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변호사수임료가 정말로 가관입니다. 이게 무슨 소송도 아닌데 수임료로 1천만 원에서 5천만 원까지 요구합니다. 너무 비싼 수임료로 변호사 선임을 포기하고 홀로 준비하여 오래 기다리는 경우는 차라리 다행이지요. ‘없는’ 살림에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 그 수임료를 충당했다는 경험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이 푹푹 새어 나옵니다.
호적정정 신청을 마쳤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땅히 관련법이 없으니, 호적정정 가부에 대한 판단은 오직 담당판사의 재량에 달려있는 것이고 판사의 가치관에 따라 기각과 허가가 판가름나게 됩니다. 이렇다 보니 ‘OO지법에 가면 정정을 잘해준다더라’하는 소문이 나면 그 지역으로 호적지를 이전해 정정신청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나마 지난 해 5월 대법원에서 FTM(*) 트랜스젠더의 호적정정에 관한 허가 판결이 나면서 희망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관련 법률이 없다’, ‘대법원의 선 판례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기각되었던 사례들의 근거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고 트랜스젠더의 인권에 손을 들어주었던 기쁜 소식이었지요.
그러나 대법원은 뒤이은 지난 9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 지침’을 발표하면서 트랜스젠더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지침’이 가지고 있는 조항들은 트랜스젠더를 국가의 관리 대상이자 잠재적인 범법자라고 전제하고 있었을 뿐더러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현실은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성전환자 성별변경관련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와 함께 준비한 관련 법안 발의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깊은 우려와 좌절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호적관련 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심지어 호적정정 후에도 호적등본과 주민등록초본에는 정정사실을 기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산을 넘었더니 건널 엄두도 나지 않는 넓은 강을 마주한 듯한 상황입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문제가 아닌 것이 없으니, 가끔은 참으로 막막하기도 합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과 어떻게 운동을 만들어나가야 할지……. ‘지렁이’ 활동가들은 서로 다독여가며 말하곤 합니다. 조금씩 천천히 오래오래 해나가자고, 그래도 꾸준히 시끄럽게 하다 보면 언젠간 좀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 Female Transfer Male 혹은 Female To Male의 약자.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스스로 남성으로의 성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
한무지 님은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0 호 [입력] 2007년 02월 06일 21: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