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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활동가들은 과연 소수자 감수성이 뛰어난 것일까?라는 것이 고민의 시작이 되었다.
사 실 나에게 퀴어판에서의 퀴어는 대부분 ‘동성애자’를 일컫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성전환자와 관련된 활동을 할 때의 우리는 성전환자였지만……. 항상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 활동을 할 때의 고민은 “왜 나는 성전환자가 아닌가?” 였다. 상담전화와 인터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죄송하지만, 전화 받으시는 분은 당사자이신가요?”, “당사자를 만나보고 싶어요” 라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활동을 한다고 해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당사자로서의 지위를 경험하기 위해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할까라는 어이없는 생각도 했다. 나는 이 단체와 성전환자 이슈를 고민하며 열심히 활동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당사자와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중간고리 입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 지만 이런 고민들과는 또 별개로, 나 스스로에게도 ‘성소수자로서의 당사자성’은 꽤나 큰 것이었다. 어떤 연대 활동을 할 때였다. 당시에 참여하던 단체들 중에는 성소수자 단체가 아닌 곳들도 꽤 있었는데, 나는 그중 어떤 남자 활동가에게 “소개팅을 시켜주고 싶은데, 어떤 여자가 이상형이예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당사자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는 그 사람이 비성전환-이성애-남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그 분이 저 정체성에 들어맞는 분일 수도 있지만, 그런 질문을 한 나 스스로에게 든 생각은 좌절 그 자체였다. 당사자 단체에서 당사자만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 나도 결국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니까. 또한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비성전환-헤테로 남성이나 여성이 퀴어 관련 단체나 활동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면, 좀 더 높은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게 되고, ‘당사자도 아닌 네가’ 여기서 ‘왜’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끊임없이 확인을 하고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이 지나고 나면 그러한 ‘이성애자’나 ‘퀘스처닝’인 사람들의 활동이나 정체성을 이 판 안에 아웃팅 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시달리곤 했다. 당사자만이 활동을 하는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강박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활동을 할 때는, ‘당사자가 아님’을 알리고 그럼에도 당사자에 상응하는 정당성을 인증받거나, 혹은 그만큼의 열정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는 또다른 강박을 가져온다.
퀴 어운동판에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있으면서 계속해서 들었던 자괴감은 내가 어디에서도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트랜스젠더 운동을 할 때는 내가 트랜스젠더가 아니었고, 다른 퀴어 안에서도 나는 당사자가 아니었다. 소수자라는 이름 안에서 당사자인 나는 ‘우리 퀴어’ 안에서는 비당사자의 위치에 놓여있는 듯 했다. 내가 당사자인 혹은 저 안에서 호명되지 않은 다른 퀴어들의 자리는 없었다. 트랜스젠더들의 성적지향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비트랜스젠더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트랜스젠더 이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바이섹슈얼은 소수자조차 되지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퀴어 단체들의 회의 자리에서도 이런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성소수자나 퀴어라는 말을 사용해서 회의를 시작해도, 결국 이야기는 ‘동성애자들’이라는 단어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동성애자가 모든 LGBTQ를 포함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런 “동성애자”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드는 자괴감은 어쩔 수 없었다. “동성애자가 아니라, 성소수자라고 말해주세요. 양성애자도 있고, 트랜스젠더 중에는 이성애자도 있습니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야 했다. 이렇게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하고 있는 그리고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운동이 퀴어 운동이 아니라 동성애자 운동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퀴어 운동을 뭐라고 정의 할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퀴어 운동이 동성애자 운동은 아니다.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연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물론 한국 퀴어 운동의 시작은 동성애자 운동으로 시작했다 생각하지만, 지금은 동성애자의 문제 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정체성, 성적지향의 문제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런 문제의식이 드는 것 자체가 동성애 당사자성이라는 것이 성소수자 내에 얼마나 큰가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 지만 퀴어운동을 하면서 드는 가장 큰 고민은 동성애자로서의 당사자가 아닌 내 위치에서 ‘당사자 운동’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나 역시 어느 정도의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위치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동성애자로서의 당사자 운동에 마음으로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끔은 레즈비언이 대다수인 자리에서 나 또한 “우리 레즈비언”이란단어를 즐기면서 내가 레즈비언인 양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뭐, 레즈비언하고 바이섹슈얼이 딱히 100% 다른 존재이기만 한 건 아니지만). 어쩌면 내가 바이섹슈얼로서 퀴어라는 지위를 점유할 수 없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동성애자의 위치를 양성애자의 위치와 함께 가져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것은 비성전환-바이섹슈얼로서의 피해의식과 스트레스에서 나오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퀴어활동판에서 활동을 하는 다른 비성전환/비동성애(양성애자 혹은 이성애자 퀴어) 활동가들이 나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들의 자긍심 또한 클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렇다면 퀴어 운동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 해야 하는,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LGBTQQAI(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 Questioning, Asexual, Intersex의 두문자어)라는 단어로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퀴어라는 상위분류아래에서 트랜스젠더의 다양한 성적지향과, 이성애자이지만 스스로를 퀴어로 정체화하는 이들의 정체성은 포함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포함이 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퀴어 감수성을 가지고, 다양한 퀴어의제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면 되는 것인가? 세상의 비성전환자 혹은 포비아적이거나 관심이 없는 이성애자를 제외한다면 다들 퀴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하는 것은 다 퀴어운동인가? 퀴어적 감수성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과연 퀴어감수성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 쩌면 이러한 혼돈 속에 있는 것이 퀴어운동은 아닐까. 10년이 훌쩍 넘은 퀴어 운동이지만, 운동의 방향과 운동을 하는 사람은 계속 바뀌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또 다양한 고민을 한다. 변화를 고민하는 것, 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는 무엇인가를 포기하지 않고 바꾸려 노력하는 것. 말 같지도 않은 당연한 말이 퀴어운동을 이야기 하는 단순한 문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런 짜증과 불만을 토해내는 나의 말이 또 그 안에서 새로운 퀴어 운동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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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상근자로 시작하게 된 성소수자 운동은 성소수자의 인권과 관련된 환경이 얼마나 척박한가를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성전환자 성별변경 관련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가 꾸려지면서 우리가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점점 더 명확해져갔다. 지금 현실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필요를 충족해줄 수 있는 ‘법안’이었고, 법안을 만들기 위해 공동연대는 실태조사를 하고,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법안을 발의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가기 시작했다.
일련의 상황들을 겪어나가면서 트랜스젠더 인권 이슈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는 와중에 ‘트랜스젠더 인권활동단체 지렁이’(아래 ‘지렁이’)를 만났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들이 시작되었다.
지렁이는 활동가 위주의 단체였다. 활동가들이 모여 최근에 불거지는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진행해나가는 여타의 인권단체와 비슷한 형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신생단체였으니만큼 인원이 현저하게 적었다는 점? 혹은 활동가 대부분이 당사자였다는 점 정도?
지렁이 활동은 즐거웠고 행복했다. 트랜스젠더 단체가 딱히 없었던 만큼 함께 해야 할 것들도, 내/외부에서 목소리를 내야 할 일들도 많았다. 사무실도, 상근자도 없는 상황에서도 지렁이는 정말 열심히 많은 사업들을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나 개인의 고민이 커져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이 운동을 하는가?’에서 시작된 고민은 ‘왜 우리는 활동가 단체인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이 운동을 하고 있는가?’라는 것으로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인권운동이 차별 당사자 모두의 입맛에 맞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슈 파이팅이나 법안 운동을 하다보면 이론적인 논의 또한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발전들이 과히 달갑지 않았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운동은 젠더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많이 확장시켜나가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이 되면서 법안이나 사람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겨나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젠더와 수술, 법, 한국사회의 인식정도가 모두 다른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는 나에게 매우 당황스러웠다. 어떤 사람은 당연히 수술을 해야 성별 정정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사람은 수술이 꼭 중요한 것인지, 성기가 없으면 남자가 아닌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두 가지 다 중요하고 사람의 상황에 따라 주장할 수 있는 바가 매우 다르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운동은 특히나 당사자가 많이 나서지 못하는(또는 나서지 않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보다는 ‘다양한 젠더’에 대한 논의가 더 빨리 퍼져나갔다. 다양한 젠더에 관한 논의는 꼭 필요한 이야기였고 언젠가는 나왔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게 법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함께 나오기 시작한 것도 적당한 시점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내 맘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나에게 중심은 ‘당장 성별정정을 못해서 힘든 당사자’들이었지만, 내가 느끼기에 현재 인권운동에서의 중심은 점점 더 담론화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이것은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이들이 이론가-활동가이기도 했고, 당사자들의 경우도 당장의 좁은 현실보다는 큰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당사자가 아닌 나는 어떠한 목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전체 사안을 바라보고 모두의 의견을 합의시켜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책임의식에 시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당사자들을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 당사자들의 모임을 만들거나 거기 나가기도 해봤지만 그들이 활동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서비스만 제공하는 것 또한 우리가 하고자 했던 일이 아니라는 고민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의 내용을 다루지만 당사자가 부재하는 상황, 그리고 내가 당사자가 아닌 상황에서 하고 있는 인권운동은 나에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의 한계,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고민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3년차인 신생 단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한 번에 할 수 있고, 또 그런 아이디어와 여유를 가져올 수 있겠냐 싶지만 그때는 그 한계들로 인해 죽을 만큼 자존심이 상하고, 또 싫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한동안은 트랜스젠더의 T만 봐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인권운동, 성소수자 운동 다 좋지만 트랜스젠더 운동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지렁이는 요즘 뭐하냐고 묻는 것도 싫었고, 딱히 할 말이 없는 것도, 우리가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운동을 하고 싶었고, 운동을 하면서도 내 자존감이 손상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내 목소리를 내는 운동, 함께 가자고 하는 일이 어렵지 않은 운동을 하고 싶었다. 이런 나의 고민을 풀어준 것이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와 ‘(가)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이다. 이 두 단체는 지역과 당사자의 목소리를 함께 내면서 함께하는 운동을 나에게 제안해주었고, 나는 이 안에서 나의 갈증들을 조금씩 풀어나가고 있다.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동네에서 퀴어로 어떻게 살 것인가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아래 ‘마레연’)는 2010년 3월 마포에 거주하는 LGBTQ 활동가들이 모여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정치를 이야기하고, 퀴어를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마포레인보우 유권자연대’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마레연은 선거 기간에는 후보들에게 질의 등을 하면서 사업을 진행해 나갔고, 선거 이후에도 다양한 지역의 의제에 함께 해나갔다. 2010년 12월 마포레인보우 유권자연대는 전체모임을 통해 앞으로 마포 지역의 이야기를 함께하자고 결의하고 이름을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로 바꾸고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마레연의 활동은 현재 다양한 마포 지역의 사안들(두리반, 강용석 의원 사퇴 촉구 등등)에 함께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역 주민들과 친목을 쌓아나가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마레연의 활동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내가 퀴어함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살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할 곳이 생겼다는 것이다. 지역사회, 동네에서 퀴어들은 비가시화되는 존재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퀴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퀴어 당사자들도 굳이 커밍아웃을 해서 불편함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포라는 지역을 보았을 때, 처음 모인 날 다섯 명의 활동가가 마포 지역에 사는 퀴어 친구들의 수를 100명을 채울 수 있었을 정도로 퀴어의 수가 많은 편이다.
물론 마포에 다른 퀴어 친목 모임들도 꽤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마레연이 다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친목모임과 더불어 그 모임 내에서 인권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매달 열리는 퀴어 밥상에서는 다 함께 만든 밥을 나눠먹으면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그즈음의 사안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두리반이나 포이동에 후원을 하는 일을 하거나 성미산과 관련한 직접적인 액션을 하기도 하고 희망버스를 함께 타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그냥 동네에서 술을 함께 마시면서 동네의 공동체를 좀 더 공고히 해나기기도 한다. 마레연은 마포라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내가 퀴어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모델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아직은 우리가 개개인의 동네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통반장이 되어서 동네의 일에 퀴어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까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을버스에 광고를 내고, 선거 때 적극적으로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등 하나하나씩 마을 주민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살림의료생협-지역과 여성주의의 만남
이렇게 당사자로서의 내가 마레연이라는 곳에서 적극적 주체가 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면, 나는 (가)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아래 ‘살림의료생협’)에서 활동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살림의료생협은 마레연보다는 좀 더 지역이라는 곳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게 된 곳이다. 살림의료생협은 은평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 사안에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가고, 의료 혹은 건강이라는 것 자체가 어떠한 특별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기도 하다.
살림의료생협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전에 다른 활동들을 할 때는 이슈 파이팅을 할 때도 거리의 무작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거나, 이 이슈를 개선시킬 수 있는 사람들(국회의원 같은?)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면 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 사람이 지역에서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나, 이 이슈 파이팅 이후 이 사람을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생협은 활동가라는 이름보다 조합원이라는 이름이 훨씬 크게 느껴지는 곳이고, 인권활동(!)이라는 거창한 제목보다는 소모임이나 조합원 모임이라는 소소한 느낌의 표현이 많아서 사람들이 덜 부담을 느끼게 되는 듯도 하다. ‘인권활동이 뭐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 거라고 사람들은 이렇게 선뜻 발을 못 떼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제목이 가지는 힘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똑같이 무상급식을 이야기해도, ‘학생들의 인권’이라는 말보다는 ‘내 아이 건강’이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살림의료생협은 여성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여성주의적 가치를 중요하게 가지고 가는 의료생협이다. 살림의료생협을 은평 지역에 만든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매우 당황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이 내면에는 내심 여성주의라는 것이 아직은 많은 이들이 반기는 주제가 아니고 어떤 한 축에서 하고 있는 활동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은평 지역에서 2년째를 보내고 있는 살림의료생협은 지금 꽤나 잘나가는 단체 중에 한곳이다. 처음 상근을 시작하면서 했던 고민이 ‘지역과 여성주의가 과연 맞닿을 수 있을 것인가?’였는데 지금 이 고민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 비혼이거나 ‘꼴페미’들만 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어떤 부분에서 부담스러웠을 여성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살림의료생협이 이야기하는 의료생협의 가치와 닿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몸으로 받아들여가고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에게 여성주의를 꼭 실천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비혼을 존중해야 한다고 교육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바뀌어 가고 있다. 처음에는 꼭 여성주의를 지향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성주의가 뭐야?”라며 불편함을 보이던 조합원들이 이제는 나서서 기초 여성주의 학교를 수강하기도 한다. 그 과정동안 우리는 우리를 많은 부분 있는 그대로 내보였고,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 지역에서 함께 하고 싶어 하고 함께 삶을 지내갈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줬을 뿐이다.
지렁이 활동을 할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지렁이 때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정성이 있음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꼈다면 지금은 지역이라는 든든한 기반이 있어서 일까? 내가 마음을 여는 만큼 사람들은 나를 믿어준다. 도리어 내가 이러한 그들의 열린 마음에 당황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나에게 이렇게 다가오는 걸까 고민을 할 정도이다.
마레연과 의료생협 활동을 하면서, 마음이 많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내가 어떤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고민하고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는 느낌이다. 나만이 주체가 아니라 모두가 주체가 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책임감이 커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이 이후엔 나나 우리가 아닌 또 다른 우리가 더 함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인에 마음이 좀 더 편해지기도 한다.
지역은 운동이 뻗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성소수자, 여성주의자, 비혼이라는 퀴어한 주제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서 이제까지는 진행하지 않았던 다른 비전을 고민하고 있다. 마레연은 내가 이 지역의 주민이라는 지역에 대한 소속감을 심어주면서 성소수자라는 위치와 더불어 나의 주거권이나, 이 지역에서 주민으로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살림의료생협에서는 지역에서 여성주의자로 커밍아웃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음을 알고 누구도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를 나에게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어떠한 운동이 더 옳거나 지향해야 하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며 고민하던 것, 혹은 한계를 느꼈던 것들이 지역이라는 테두리를 씌우면서부터 조금씩 해갈되어간다. 소위 말하는 일반 대중을 만나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었는데 ‘나 또한 일반 대중임을 잊고 지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아직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내가 성소수자라고 혹은 비혼이나 여성주의자라고 100% 커밍아웃을 하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한 작은 커밍아웃에도 반응하고 변화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언젠가는 내가 나를 다 보여준다고 할 때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이 변화될 수 있는 지역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소리 높여 설득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보고 느끼며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 사람에 대한 믿음을 좀 더 두텁게 할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내가 지역운동을 시작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여성영화제에 글을 하나 기고했다. 짧은 글이지만, 나의 여성영화제에 대한 애정을 고백해보는 글. 좀 신랄하다며 고민하기도 했지만 뭐....그래도 난 만족한다능! 여튼 여성영화제가 벌써 코앞!!
참! 이 글은 여성영화제 뉴스레터와 블로그(iwffis.tistory.com)에도 실렸다능!! (아아..창피하다////)
여성영화제를 사랑합니다.(어느 관객의 작은 사랑고백) - 캔디.D
여성영화제에 관객의 바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여성영화제에 관객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관객 그 자체이기 보다는 여성영화제를 만들어나가는 한 구성원이며, 매해 영화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나의 여성영화제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와 사랑고백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나는 관객일 뿐 아니라, 역사.
여성영화제와 나의 인연은 서울에서 ‘비혼 여성’으로 살아내기 시작한 내 삶과 그 역사를 함께 한다. 지방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의 첫 취직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2개월을 근무한 후 노동청에 신고를 한 후에야 받은 30만원이 외로운 내 독립생활의 처음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를 추스르기 시작한 무렵 여성영화제를 알게 되었다. 그 봄, 신촌에서 처음 만난 여성영화제는 정말 “봄처럼 찬란한 빛”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활기찬 사람들, 따뜻한 눈빛들, 꼭꼭 씹어서 마음을 배부르게 해주는 수많은 영화들. 아는 사람 한명 없이 혼자 즐긴 영화들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서울이라는 황량한 공간을 사람이 꼭 한번쯤 살아야 할 공간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 후부터 내 삶은 활개를 펴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만났고, 새로운 직업을 찾았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의 열정이 폭발하는 시기는 항상 여성영화제의 시작이 있었다. 어느 해에는 참가자로 공연을 하기도 했고, 어떤 해에는 상영되는 영화에 한컷(!)이 나오는 출연자가 되기도 했고, 또 어떤 해에는 영화제의 중심에서 매거진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여성영화제는 매년 나의 1년 계획에 중요한 순간으로 체크되곤 했다.
우피스매니아 예매날짜가 결정이 되면 몇 날 며칠 영화 상영 계획표를 짜고 친구들에게 홍보전화를 돌리고, 예매날 아침 10시를 기다려 모든 계획대로 영화를 예매하는 순간의 희열!, 단 10분의 공연을 위해 오랜 시간을 밤늦게까지 연습에 연습을 하고 공연을 마쳤을 때의 쾌감, 밤새 쓴 원고를 넘기고 사람들이 내 기사를 읽는 순간을 기다리는 순간의 긴장.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영화제가 폐막이 되고 일 년이 지나 다시 여성영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의 두근거림.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자랑하는 여성영화제이다.
이렇게 나는 여성영화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고백한다. 아주 쑥스럽고 민망하기 그지없음에도 이런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이유는 너무 사랑해서 그동안 하지 못한, 하지만 꼭 해야만 했고 이야기해야 할 것들을 이제는 털어놓고자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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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성영화제가 100% 만족스럽지 않다.
물론, 세상의 어디라고 나의 입맛을 100% 만족 시켜주는 곳은 없다. 하지만, 여성영화제에 대한 불안 그것은 입맛과는 좀 다른 무언가가 있다. 여성영화제는 ‘여성’ 영화제로서의 어떤 가치와 강점이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가치와 목적을 여성영화제에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여성영화제는 나에게 뭔가 부족함을 주기 시작했다. 아마 이것은 내가 여성영화제에 좀 더 애정을 갖기 시작하면서 보게 되기 시작한 점들일 것이다.
여성영화제가 매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보이고, 느껴지는 명확한 사실이다. 매해 영화제는 점점 더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다양한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 노력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작년부터 매달 마지막 목요일에 하고 있는 정기상영회는 정말 지지하고 격려하고 싶다!)
그래서 매해 영화제의 영화들은 나에게 만족감과 행복, 그리고 고민거리들을 전해준다. 그런데, 점점 더 개개의 영화들보다는 전체 여성영화제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 ‘영화제’에서 항상 나는 ‘여성’에 더 방점을 찍어 왔다. 그런데 여성영화제는 점점 더 ‘영화제’에만 방점을 찍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느낌을 준다. 여성영화의 혹은 여성의 무언가를 더 이야기 한다기보다, 그저 매년 개최되는 ‘영화제’의 ‘개최 그 자체’가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수많은 여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여성의 정체성, 여성의 삶, 여성의 현실, 그리고 여성주의 영화들이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있지만, 그 영화제를 꾸려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 여성영화제의 어떠한 정체성에 동의하고 있는가? 이 여성영화제가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이해하는가? 라는 부분에 끊임없이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작은 자막 번역 하나에서, 감수성 없는 통역에서, 혹은 자원 활동가들의 작은 실수에서 툭툭 튀어나온다. 일일이 무언가를 지적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소한 부분들 때문에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애정의 기운이 빠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실수들은 전문가의 영입이 어렵다거나, 예산이 줄어들고 있거나, 자원 활동가들의 교육이 덜 충분했다거나 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정말 그냥 그 순간의 실수였을 수도 있다. 그저 한순간의 실수였다면 다음해에는 더욱 긴장을 하고 고쳐나가면 되지만, 혹시나 정말 예전 규모의 영화제를 하기 힘든 상황이 온다거나, 여성영화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었다거나, 사람들이 여성영화제를 ‘무사히 개최하는 것’에만 집중하기 시작한 거라면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을 그때의 마음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고 하는 캐치프레이즈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여성영화제를 사랑하는 관객들이, 영화제를 만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했고, 또 나누고자 했던 그 하나의 마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다양한 영화를 보여주기보다, 더 적은 수의 영화를 보여주더라도 더 많은 감수성을 공유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여성영화제가 되기를 바란다. 크고 화려한 여성영화제가 당장 되지 못하더라도, 관객 개개인의 소소한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일 수 있는 영화제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여성영화제는 4월 7일에 시작된다. 올해의 나는 영화제의 어느 곳에서 영화를 즐기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분명 나는 올해도 여성영화제에 열광 할 것이고, 동시에 또 이런저런 비판을 던질 것이다. 이것은 여성영화제에 대한 사랑이고, 동시에 사랑하고 있는 나를 아끼고 건강하게 키워나가고 싶은 나의 작은 다짐이다.
스스로를 바이섹슈얼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어떤 정체성이든 자신을 명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바이섹슈얼이라고 스스로를 이야기 하는것은 특별하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헤테로 사회에 내가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 하는 것이고,
동성애자 사회에 나는 동성애자가 아님을 커밍아웃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 다에게 이해 받으면 좋으련만, 가끔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꼭 생긴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바이는 사귀는 애인에 따라 헤테로 사회에서는 헤테로인척 하고, 동성애자 사이에서는 동성애자인 척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커밍아웃 하는 많은 동성애자가 그러하듯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인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은 절대 아니다)바이도 나 스스로 자신에게 당당하고 싶다는 목소리인데 그게 지지받고 싶은 곳에서 마저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순간 어쩌면 그들은 혼돈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냥 두가지 정체성을 갈라내서 다른 쪽에 대해서는 아예 눈과 귀를 막고 살아야 하는걸까?
어떤 L커뮤니티에서 바이라는 글이 올라오면 "너희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가라!"라는 말을 많이 한다. 너희만의 커뮤니티라니. 얼마나 더 갈라내고 싶은걸까? 왜 바이라고 하면 "일부 양다리를 걸치는 바이"이야기를 하면서 그래서 바이가 불편하다라고 이야기 하는걸까. "일부 미친 레즈비언들"도 분명 있는데, 그들을 레즈비언으로 인정하는 것과 바이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걸까?
바이를 바이가 아니게 만드는 것은 바이섹슈얼 스스로가 아니라 "돌아오면 된다"라고 말하는 헤테로들이나 "바이는 불편하다/ 여자(게이커뮤니티라면 남자)를 만나면 레즈비언인거 아니냐 / 남자(여자) 만날까봐 불안하다"라고 말하는 동성애자들인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 커뮤니티에서 겪은 상처들을 고스란히 바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걸까? 알면서도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하는걸까?
바이섹슈얼이 바이섹슈얼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명명이지만,
바이가 바이이지 못하게 하는것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비판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LGBT의 뜻과 의미를 잊지 말자. 너무나 흔히 말하는 차이와 차별을 잊지 말자.
차별받는 이들 안에서 또 되풀이 되는 차이와 차별은 없었으면 한다.
지금 나는 계속적인 고민에 빠져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것일까.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만으로 단체가 굴러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다들 힘들고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가 되지 않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이 활동은 계속 지속되어야만 하는 활동인 것이다.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고, 우리가 아직도 놓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나는....... 사실 조금 버겁다.
늘 한구석에 놓여있는 고민 - 나는 당사자가 아니다 - 은 몇년이 지나도록 나를 놔주지 않는다. 당사자 단체의 폐쇄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내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과정들도 알고 있지만, 지금은? 지렁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주고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아직도 오는 전화의 대부분은 "당사자를 만나고싶어요"이다. 나는 연결고리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건가?
존재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단체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름만 걸고 있고, 홈페이지는 스팸으로 뒤덮여있고, 사람들은 모이지 않는 단체가 이미 단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한동안은 혼자라도 움직이자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결정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혼자 뭘 해야 할지도 막막해지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마저 저하되는 느낌이랄까.
평생을 해나갈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운동이 궤도에 오르고, 많은 활동가들이 열의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단체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닦고 싶었다. 적어도 그정도만큼은 해내고 싶었다.
누구든 붙잡고 원망하고 싶다. 지지한다면, 당사자라면, 너무 힘들어도 내가 나서서 하겠다고 좀 해주면 안되는걸까? 필요하다면서, 없애지 말아야 한다면서, 결국 그 짐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다시 돌려버리는거잖아. 어떻게 하라는거지?
누가 사무실이라도 주실래요? 누가 단 한명의 월급이라도 보장해주실래요? 아니, 그런거 다 필요 없으니까면 누가 열심히 한번 운동해보고 싶다고 와주실래요? 이 무거운 이름을 등에 업고 걸어가줄 사람....어디 없는건가요?
무거워진다. 내려놓고 싶지만 내려놓기 싫고 내려놓을 수가 없다. 외면할 수 있는 만큼 외면했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앞으로 가든, 멈추든 결정을 해야만 하는 시기가 온거다.
난.................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현재 나는 여자를 만나고 있다. 아니, 여자를 만나기 이전에도 '이젠' 여자만 만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점점 더 바이섹슈얼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하기는 어려워진 듯 하다. 아니, 스스로도 점점 헷갈리고 있다. 나는 바이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지금 여자를 만나고 있는 바이섹슈얼일 뿐인데, 이러한 상황이 나를 '레즈비언'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이 계속된다.
얼마전에 애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내가 '남자를 만날 생각이 없으면서 바이섹슈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남자에게 끌릴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남자를 만날 생각은 없고, 여자를 계속 만날 것인 나'는 바이섹슈얼이라고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과 관련해서는 '레즈비언이지만, 여자와 연애하지 않고 홀로살겠다' 혹은 '레즈비언이지만 현실적인 상황때문에 남자와 결혼할것이다'와도 약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이렇게 말하면 또 욕얻어먹으려나;;;)
그렇다면 정말 바이섹슈얼은 연애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혹자들은 나에게 바이섹슈얼은 어떠한 정체성으로 가는 과정위에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확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바이섹슈얼 자체가 정체성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정체성은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지만 또한 타인들에 의해서 인정받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혼자 죽어라고 바이라고 떠들어도,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레즈비언이라고 말을 한다면 나는 어떠한 부분에서는 바이섹슈얼이 아니게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정체성이란건 또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는걸까.
바이 이야기는 하면 할 수록 생각을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아리송 한 것이 되어간다. 또 얼마 전에는 팸/부치 이야기를 하다가 '디는 팸/부치가 아니라 그냥 '바이'야' 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순간 또 울컥 했었는데, 왜 바이는 바이로만 보여지고 바이의 다양함까지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테로 부치 이야기는 쉽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바이는 팸/부치와 연관이 안되는걸까...라는 고민.
모르겠다. 고민이 깊어져가는 것인지, 그 고민이 나에게 또한 퇴화되고 연해져만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연애를 시작하고 '여자를 만나요'라는 말에 '그럼 레즈비언인거잖아'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고, 그럼에도 나는 레즈비언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레즈비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함께 이야기 하면서 성소수자나 LGBT라는 말보다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더 쉽사리 써버리는 나를 깨달으면서, 이래서 수많은 소수의 것들은 뭍혀져버리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많이 이야기 하고, 좀 더 폭넓게 이야기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 스스로도 여전히 정리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
드디어 열번째의 퀴어문화축제가 끝이 났다.
10회라는 엄청난 사건에 기획단으로 함께 하지 못했던 서글픔(?)이 있었고,
지렁이 부스 준비라는 난관에 봉착했었지만, 뭐.... 퀴어문화축제는 또 성황리에 끝이 났다.
하나. 지렁이 부스는 작년보다 더 나았다. 아무래도 솜사탕과 손수건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을 해보긴 한다. 덕분에 예년같이 놀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뭐, 그래도 공연은 거의 본 듯 하다)
둘. 우리의 행사들이 진행될때마다 눈물이 난다. 이렇게 신나서 환호하는 우리가 있음에 감동받고, 서로 지지해줄 수 있는 우리가 있음에 감동받고,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얼굴을 가려야만 하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 서러워서... 퍼레이드를 하는 내내 눈물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셋. M의 서포트로 스쿠터'님'을 '모시고' 종로까지 나올 수 있었다. 처음 멀리까지 몰아보는 125cc에 초 긴장했었지만, 집-종로, 종로-신촌, 신촌-종로, 종로-동대문, 동대문-종로, 종로-이태원, 이태원-집 이라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사고 한번 없이 신나게 질주했다. 다만, 남산1호터널에서 이태원가는 길을 헤메서 좀 머리가 아팠을 뿐?
넷. 사람들이 캔디는 퀴어문화축제에서 뭘 하냐고 곧잘 묻곤 한다. 최근 몇년간 알아온 이판 이외의 LGBT 친구들에게 난 그런 사람인가보다 라고 생각하면 또 혼자 배시시 웃었다.
다섯. 그래서 11회에는 꼭 기획단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절대 퀴어문화축제가 멈추거나 끝나서는 안된다고, 어떻게든 꼭꼭 즐겁게 내년에도 해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대들의 땀방울과 눈물방울의 가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공감하고 있을껍니다. 그리고 그 힘을 받아서 올해를 지내고, 또 내년을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걱정도 되고, 긴장도 되고.... 오만감정이 교차하던 그곳에서 기어코 큰 사고가 나고말았다.
어떤 %&*^*&^*@(#한 xx가 사진을 찍은 것. 어떤 좋은 말도 나올 수 없다.
결론만 말하자면 한시간이 넘는 실랑이 끝에 사진을 돌려받고 폐기시키긴 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몸떨림과 분노 그리고 공포.
처음부터 걱정했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1년여간의 공동체 상영에서 아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기 때문인지 다들 방심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사건은 터졌고, 계속되는 공포는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그리고 영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내내 함께 할지도 모른다.
커밍아웃을 한다는것. 그리고 그것을 대 사회적으로 한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의미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이고, 나를 알리는 이 일이 결코 쉬운일일리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용기에 지지를 보내고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가 없다. 그들은 과연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그 공포를 진정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 주인공은 "당신이 1초만에 찍은 사진 한장이 내 30여년의 인생을 무너뜨릴 수 있다", "내 인생을 걸고 찍은 다큐멘터리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그 말이 그 사람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이것은 아직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삶의 문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긴장하고, 걱정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커밍아웃의 긍정적 효과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아웃팅의 공포는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산재해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난.....
여전히 두렵다.
그리고, 오늘 사건을 계기로 더 많이 두려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