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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좋은 기회로 쓰게 된 글이 드디어 나왔다. 사실 지금 일하는 곳에서 전에 했던 일들에 대해 말해본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는게 좀 부담이 되기도 했었는데... 그냥 뭐 어떠리.. 싶은 맘과 그래도 말해볼까? 싶은 맘.. 그리고 나도 뭔가 정리해보고 싶어! 라는 맘으로 쓰게 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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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닌 "모두 함께" 말하는 운동


캔디.D | (가)살림의료생협 활동가,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 당번

2011년 10월. 무슨 ‘활동가’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6년차. 한 곳에 진득하니 있지는 못했지만 점점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을 찾아가는 듯하다.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상근자로 시작하게 된 성소수자 운동은 성소수자의 인권과 관련된 환경이 얼마나 척박한가를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성전환자 성별변경 관련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가 꾸려지면서 우리가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점점 더 명확해져갔다. 지금 현실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필요를 충족해줄 수 있는 ‘법안’이었고, 법안을 만들기 위해 공동연대는 실태조사를 하고,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법안을 발의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가기 시작했다.

일련의 상황들을 겪어나가면서 트랜스젠더 인권 이슈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는 와중에 ‘트랜스젠더 인권활동단체 지렁이’(아래 ‘지렁이’)를 만났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들이 시작되었다.

지렁이는 활동가 위주의 단체였다. 활동가들이 모여 최근에 불거지는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진행해나가는 여타의 인권단체와 비슷한 형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신생단체였으니만큼 인원이 현저하게 적었다는 점? 혹은 활동가 대부분이 당사자였다는 점 정도?

지렁이 활동은 즐거웠고 행복했다. 트랜스젠더 단체가 딱히 없었던 만큼 함께 해야 할 것들도, 내/외부에서 목소리를 내야 할 일들도 많았다. 사무실도, 상근자도 없는 상황에서도 지렁이는 정말 열심히 많은 사업들을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나 개인의 고민이 커져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이 운동을 하는가?’에서 시작된 고민은 ‘왜 우리는 활동가 단체인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이 운동을 하고 있는가?’라는 것으로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인권운동이 차별 당사자 모두의 입맛에 맞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슈 파이팅이나 법안 운동을 하다보면 이론적인 논의 또한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발전들이 과히 달갑지 않았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운동은 젠더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많이 확장시켜나가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이 되면서 법안이나 사람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겨나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젠더와 수술, 법, 한국사회의 인식정도가 모두 다른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는 나에게 매우 당황스러웠다. 어떤 사람은 당연히 수술을 해야 성별 정정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사람은 수술이 꼭 중요한 것인지, 성기가 없으면 남자가 아닌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두 가지 다 중요하고 사람의 상황에 따라 주장할 수 있는 바가 매우 다르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운동은 특히나 당사자가 많이 나서지 못하는(또는 나서지 않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보다는 ‘다양한 젠더’에 대한 논의가 더 빨리 퍼져나갔다. 다양한 젠더에 관한 논의는 꼭 필요한 이야기였고 언젠가는 나왔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게 법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함께 나오기 시작한 것도 적당한 시점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내 맘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나에게 중심은 ‘당장 성별정정을 못해서 힘든 당사자’들이었지만, 내가 느끼기에 현재 인권운동에서의 중심은 점점 더 담론화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이것은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이들이 이론가-활동가이기도 했고, 당사자들의 경우도 당장의 좁은 현실보다는 큰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당사자가 아닌 나는 어떠한 목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전체 사안을 바라보고 모두의 의견을 합의시켜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책임의식에 시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당사자들을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 당사자들의 모임을 만들거나 거기 나가기도 해봤지만 그들이 활동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서비스만 제공하는 것 또한 우리가 하고자 했던 일이 아니라는 고민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의 내용을 다루지만 당사자가 부재하는 상황, 그리고 내가 당사자가 아닌 상황에서 하고 있는 인권운동은 나에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의 한계,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고민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3년차인 신생 단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한 번에 할 수 있고, 또 그런 아이디어와 여유를 가져올 수 있겠냐 싶지만 그때는 그 한계들로 인해 죽을 만큼 자존심이 상하고, 또 싫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한동안은 트랜스젠더의 T만 봐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인권운동, 성소수자 운동 다 좋지만 트랜스젠더 운동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지렁이는 요즘 뭐하냐고 묻는 것도 싫었고, 딱히 할 말이 없는 것도, 우리가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운동을 하고 싶었고, 운동을 하면서도 내 자존감이 손상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내 목소리를 내는 운동, 함께 가자고 하는 일이 어렵지 않은 운동을 하고 싶었다. 이런 나의 고민을 풀어준 것이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와 ‘(가)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이다. 이 두 단체는 지역과 당사자의 목소리를 함께 내면서 함께하는 운동을 나에게 제안해주었고, 나는 이 안에서 나의 갈증들을 조금씩 풀어나가고 있다.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동네에서 퀴어로 어떻게 살 것인가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아래 ‘마레연’)는 2010년 3월 마포에 거주하는 LGBTQ 활동가들이 모여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정치를 이야기하고, 퀴어를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마포레인보우 유권자연대’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마레연은 선거 기간에는 후보들에게 질의 등을 하면서 사업을 진행해 나갔고, 선거 이후에도 다양한 지역의 의제에 함께 해나갔다. 2010년 12월 마포레인보우 유권자연대는 전체모임을 통해 앞으로 마포 지역의 이야기를 함께하자고 결의하고 이름을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로 바꾸고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마레연의 활동은 현재 다양한 마포 지역의 사안들(두리반, 강용석 의원 사퇴 촉구 등등)에 함께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역 주민들과 친목을 쌓아나가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마레연의 활동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내가 퀴어함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살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할 곳이 생겼다는 것이다. 지역사회, 동네에서 퀴어들은 비가시화되는 존재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퀴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퀴어 당사자들도 굳이 커밍아웃을 해서 불편함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포라는 지역을 보았을 때, 처음 모인 날 다섯 명의 활동가가 마포 지역에 사는 퀴어 친구들의 수를 100명을 채울 수 있었을 정도로 퀴어의 수가 많은 편이다.

물론 마포에 다른 퀴어 친목 모임들도 꽤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마레연이 다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친목모임과 더불어 그 모임 내에서 인권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매달 열리는 퀴어 밥상에서는 다 함께 만든 밥을 나눠먹으면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그즈음의 사안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두리반이나 포이동에 후원을 하는 일을 하거나 성미산과 관련한 직접적인 액션을 하기도 하고 희망버스를 함께 타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그냥 동네에서 술을 함께 마시면서 동네의 공동체를 좀 더 공고히 해나기기도 한다. 마레연은 마포라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내가 퀴어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모델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아직은 우리가 개개인의 동네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통반장이 되어서 동네의 일에 퀴어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까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을버스에 광고를 내고, 선거 때 적극적으로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등 하나하나씩 마을 주민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살림의료생협-지역과 여성주의의 만남

이렇게 당사자로서의 내가 마레연이라는 곳에서 적극적 주체가 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면, 나는 (가)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아래 ‘살림의료생협’)에서 활동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살림의료생협은 마레연보다는 좀 더 지역이라는 곳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게 된 곳이다. 살림의료생협은 은평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 사안에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가고, 의료 혹은 건강이라는 것 자체가 어떠한 특별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기도 하다.

살림의료생협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전에 다른 활동들을 할 때는 이슈 파이팅을 할 때도 거리의 무작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거나, 이 이슈를 개선시킬 수 있는 사람들(국회의원 같은?)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면 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 사람이 지역에서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나, 이 이슈 파이팅 이후 이 사람을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생협은 활동가라는 이름보다 조합원이라는 이름이 훨씬 크게 느껴지는 곳이고, 인권활동(!)이라는 거창한 제목보다는 소모임이나 조합원 모임이라는 소소한 느낌의 표현이 많아서 사람들이 덜 부담을 느끼게 되는 듯도 하다. ‘인권활동이 뭐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 거라고 사람들은 이렇게 선뜻 발을 못 떼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제목이 가지는 힘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똑같이 무상급식을 이야기해도, ‘학생들의 인권’이라는 말보다는 ‘내 아이 건강’이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살림의료생협은 여성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여성주의적 가치를 중요하게 가지고 가는 의료생협이다. 살림의료생협을 은평 지역에 만든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매우 당황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이 내면에는 내심 여성주의라는 것이 아직은 많은 이들이 반기는 주제가 아니고 어떤 한 축에서 하고 있는 활동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은평 지역에서 2년째를 보내고 있는 살림의료생협은 지금 꽤나 잘나가는 단체 중에 한곳이다. 처음 상근을 시작하면서 했던 고민이 ‘지역과 여성주의가 과연 맞닿을 수 있을 것인가?’였는데 지금 이 고민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 비혼이거나 ‘꼴페미’들만 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어떤 부분에서 부담스러웠을 여성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살림의료생협이 이야기하는 의료생협의 가치와 닿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몸으로 받아들여가고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에게 여성주의를 꼭 실천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비혼을 존중해야 한다고 교육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바뀌어 가고 있다. 처음에는 꼭 여성주의를 지향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성주의가 뭐야?”라며 불편함을 보이던 조합원들이 이제는 나서서 기초 여성주의 학교를 수강하기도 한다. 그 과정동안 우리는 우리를 많은 부분 있는 그대로 내보였고,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 지역에서 함께 하고 싶어 하고 함께 삶을 지내갈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줬을 뿐이다.

지렁이 활동을 할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지렁이 때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정성이 있음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꼈다면 지금은 지역이라는 든든한 기반이 있어서 일까? 내가 마음을 여는 만큼 사람들은 나를 믿어준다. 도리어 내가 이러한 그들의 열린 마음에 당황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나에게 이렇게 다가오는 걸까 고민을 할 정도이다.

마레연과 의료생협 활동을 하면서, 마음이 많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내가 어떤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고민하고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는 느낌이다. 나만이 주체가 아니라 모두가 주체가 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책임감이 커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이 이후엔 나나 우리가 아닌 또 다른 우리가 더 함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인에 마음이 좀 더 편해지기도 한다.

지역은 운동이 뻗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성소수자, 여성주의자, 비혼이라는 퀴어한 주제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서 이제까지는 진행하지 않았던 다른 비전을 고민하고 있다. 마레연은 내가 이 지역의 주민이라는 지역에 대한 소속감을 심어주면서 성소수자라는 위치와 더불어 나의 주거권이나, 이 지역에서 주민으로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살림의료생협에서는 지역에서 여성주의자로 커밍아웃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음을 알고 누구도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를 나에게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어떠한 운동이 더 옳거나 지향해야 하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며 고민하던 것, 혹은 한계를 느꼈던 것들이 지역이라는 테두리를 씌우면서부터 조금씩 해갈되어간다. 소위 말하는 일반 대중을 만나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었는데 ‘나 또한 일반 대중임을 잊고 지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아직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내가 성소수자라고 혹은 비혼이나 여성주의자라고 100% 커밍아웃을 하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한 작은 커밍아웃에도 반응하고 변화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언젠가는 내가 나를 다 보여준다고 할 때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이 변화될 수 있는 지역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소리 높여 설득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보고 느끼며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 사람에 대한 믿음을 좀 더 두텁게 할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내가 지역운동을 시작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2011/11/20 02:35 2011/11/20 02:35

고민이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하고 살 것인가.

어떤것이 행복한 길인지는 명확하다.

어떤것이 우선순위인지도 명확하다.

하지만 선택을 하기에 나는 너무 실리적이고 나약하다.



엊그제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적게 의미있는 돈을 벌면서 친구들에게 얻어먹는데 덜 미안해 하며 살고 싶던때가 있었다.

지금은, 나에게 덜 가치있는 방법으로 돈을 벌더라도 넉넉하게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빚도 갚고, 집도 지상으로 이사가고, 냥이들에게도 좋은 밥을 주고, 충분한 모래도 주고,

엄마아빠 용돈은 못드려도 보험료정도는 내주고,

데이트한번 할때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적게 쓸까 고민하지 않고,

친구들 만날때마다 돈 걱정하지 않고,

내가 넉넉하진 않아도 친구들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그런 넉넉한 경제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006년 이후, 월급은 점점 적어져만 갔다.

한번도 불행하거나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그랬다.

그런데,

요즈음의 어느순간에 그게 사라져가고 있다.

엄마에게 지원금을 받는것도, 친구들에게 얻어먹는것도, 누군가의 돈을 빌리고 바로 주지 못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이력서를 냈다.

안되면 말지! 라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취직되었으면 좋겠다.

안되면 논문에 집중할 수 있고 좋지! 라고 말했지만, 경제적 불안에 후덜덜하면서 논문따윈 더 쳐다보지도 못할꺼란걸 알고있다.

돈을 벌면, 취직을 하면 논문쓰기는 더 어려워질꺼란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돈을 벌지 못하면 내 생계가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논문을 쓰고, 더 좋은 곳에 취직하면 좋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 사이에 나는 더 많은 빚을 지게 되거나, 아니, 사실은 그 빚마져 질 능력이 되지 않아서 더 힘들어질꺼다.

이게 나의 현실적 판단이다.

돈없다는 말 말고 외식하지 말고 택시타지 말라면 할말은 없다.

.... 그돈이 세이브 된다고 문제가 해결될게 아니다..라는 말도 변명밖에 안될까.


물론, 이렇게 말하지만, 이번 취직이 안된다면,

적은 월급을 받고 다시 논문을 쓸 방도를 고민할꺼다.

어떻게든 될거라는건 알고 있지만,

논문에 집중하지 않기 위한 변명꺼리를 찾고 있는건 아닌지 또 고민이 된다.

아....모르겠다.
2011/11/18 00:30 2011/11/18 00:30

애인과 연애를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늘 언제 커밍아웃을 할 것인지, 어떻게 엄마에게 이야기 할 것인지에 대해 긴장하고 고민을 하곤 한다.

그래서 고민끝에 만들어낸 전략은 친한 비혼 친구들과의 미래를 끊임없이 이야기 하는 것.

이건 꼭 애인과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비혼으로서의 나의 미래 비전을 엄마에게 이야기 함으로써 엄마가 딸이 결혼을 안해도 덜 걱정하도록 하겠다는 나의 고도의 전략이다.

아래는 엄마와의 대화.

"엄마 나 **랑 나중에 같이 살라고"
(왜 그러는지 궁금해함)
"나중에 귀농할껀데, 여자 혼자 귀농하면 사람들이 좀 그러기도 하고 그러니까 같이 할 친구가 있음 좋잖아. 근데 **는 나보다 농사도 잘 짓고 말도 통하고 그래서 같이 귀농하려고"
(약간 수긍)
"응 당장은 아니고 나는 한 10년 안에 하려고 하는데, **는 이것저것 하고 나면 한 15년정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일단 같이 살면서 땅이랑 살 돈도 같이 모으고 그럴꺼야"
(그래도 둘 다 결혼해야 하는거 아니냐며-_-)
"됐어. 결혼 안하고 살 친구야. 얘 말고도 결혼 안하고 살 친구들 주위에 넘치거등. 우리동네에 혼자 사는 친구도 많고 같이 사는 친구들도 많아. @@랑 %%도 지금 같이 살잖아. 엄마 전에 봤지 그 친구들? "
(혼자 사는 친구들과 나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
"그래서 의료생협도 하는거고, 언니네같은 단체도 있는거고, 나도 지금 내 미래에 투자하고 있는거야. 노후 보장은 의료생협이 있어 걱정마! (라며 슬쩍 엄마에게 생협 가입도 권유)

(갑자기 애인을 어디서 만났는지 궁금해 하기 시작)
"언니네에서 만났잖아. @@랑 %%보다 1년정도 나중에 만났어. 근데 농사 하면서 급 친해졌지 뭐"
(애인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 기본적 정보는 알고 있음)
"응 아직도 같은 일 하지. 왜 별명부르냐고? 이름이 AA인데, 부를때 AA야! 하기도 좀 그렇고 AA씨! 도 이상하고-ㅁ- AA언니는 왠지 싫어;;;; 본인도 언니라고 불리는거 싫다고 하고. 그러니까 **라고 부르는거지 :) 주위 친구들도 다 서로 별명부르잖아"

......

뭐.... 엄마한테 10여년을 결혼안한다고 이야기해왔고,
(엄마 생각에) 결혼할 뻔한 상황도 한번 지냈고,
나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보이니
이제는 엄마가 심각하게 결혼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뭐;; 전에도 그렇게 심각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엄마가 결혼을 이야기 하기 이전에 비혼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친구들이 얼마나 건강하게 즐겁게 "잘" 살아가고 미래를 준비해나가고 있는지, 이 친구들에게 내가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비혼으로서의 삶이 절대 불행하거나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엄마가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듯 하다.

아..말이 또 옆으로 샜구나.

여튼 그래서 비혼 친구와 애인의 미묘한 경계를 타고 서서 나는 엄마에게 늘 커밍아웃아닌 커밍아웃을 한다.

이 친구와 미래를 함께 할 것이라는 뉘앙스를 늘 풍기고,
이 친구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어필하고,
얼마나 배울 것이 많은 친구인지 어필한다.

엄마는 나에게 그 친구가 빨리 결혼해야 나도 보고 부러워서 결혼할 것이라고 말을 하거나,
그래도 그 친구가 결혼하면 어쩔꺼냐고 말을 하거나,
그 친구가 참 좋은 친구라고 응대해준다.

아마, 엄마도 **가 내 애인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거의 애인에 준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듯 하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속 어필하고 즐겁게 잘 지내는 것 뿐.

이번에 엄마가 다쳐서 내려갔을때도, **가 엄마 걱정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사골을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돌아와서 피곤해보이는 나와 맛난걸 먹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우리 엄마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한다.

자... 이제는 또 어떤 전력을 또 짜볼까?


2011/09/12 00:13 2011/09/12 00:13

말하고 싶다.

Diary/단상 2011/09/08 01:22
말하고 싶은 욕구가 꼬물꼬물 올라오는 밤이다.

엊그제 엄마의 병실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인 이야기도 (친구인양) 열심히 했고, 내가 꿈꾸는 미래 이야기도 했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많이 많이 했다.

그러고 나는 체증이 좀 가라앉는 듯 하고 기분이 좋아진 것도 같다.

레인보우링의 이번 특집은 바이섹슈얼이다.

몇달 혹은 몇년만에 열심히 회의에 참여했나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일게다.

말하고 싶다.

입이 근질근질하다.

이젠 말해야 할 때가 오고 있나보다.

이전에도, 그 전에도 말해야 할 때가 왔을때 꼭 잡지 못했었다.

이번에야 말로 꼭 잡아야겠다.

우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떠들고,

떠든 다음에는 꼭 손을 떼버려야지.

더이상 그렇게 떠들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할만큼 떠들어야겠다.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아! 이거는 캔디에게 이야기해보자, 캔디랑 이야기해보자, 캔디에게 이야기해주자! 라는 생각이 더 많이 많이 들 수 있도록 떠들어보자.

언제나 그러하듯,

나는 가능한 사람이고, 나는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나도알고 너도 알고 세상도 안다.

그러니까, 하기만 하면 되는거다.

일정이 많으면 잠을 줄이고, 노는 시간이 많으면 그만큼 다른 시간도 늘려보자.

나는, 할 수 있는 녀자니까.

힘내자.
2011/09/08 01:22 2011/09/08 01:22

할머니

Thinking 2011/09/08 01:09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네달이 지났다.

살아계실때마냥 문득문득 떠오르는 할머니의 모습이,

참..... 이상하다.

할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떤 표현을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고, 할머니의 사랑을 받기만 했고,

그냥 할머니의 사랑을 받아먹기만 했다.

그게, 그게 전부였다.

나는 할머니의 가장 사랑받는 손녀였다.

제일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더 사랑받고 싶어하던 손녀였다.

할머니가 나이가 더 많이 드신 후 조금씩 동생을 찾고, 동생에게 기대고, 동생에게 애정을 주는 것 조차 나는 질투했었고,

죽은 딸의 아들인 사촌이 눈에 밟혀 주었다던 선물에 질투했다.

할머니가 나만 사랑하길 바랬고,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은 내가 왔었냐고 묻는 것이었다고 한다.



난...... 할머니에게 해준게 하나도 없는데,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내 생각을 했단다.


아직도 할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쏟아진다.


할머니의 인생에 대한 어떤 기억도 공유하지 못한 채,

나는 그저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만 기억한다는 것이 죄스럽다.


할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했는지,

아이들을 낳고 길렀는지,

어떤 꿈이 있었는지,

어떤 기쁨과 슬픔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았는지.............. 하나도 모른다.


보고싶다.

할머니가 많이 보고싶다.
2011/09/08 01:09 2011/09/08 01:09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건 없는데,

지금은 좀 더 세상에 쪽팔리는 일이 많아졌을 뿐.
2011/08/16 10:44 2011/08/16 10:44

마레연을 만나고 나에게 가장 큰 변화는, 더 많은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

소위 말하는 "(전업)활동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던때도, 그리고 그 후에도 사실 나는 뭔가 퀴어 관련된 문제 이외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아니, 관심은 있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내 관심사가 좀 더 다양하게 눈을 돌리고 있다. 많은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연대를 했고, 그리고 그 연대의 필요성을 친구들을 통해, 사회를 통해 새록새록 느껴가고 있다.

작게나마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기 시작했고, 참여하면서 연대해야 할 것을 고민하기도 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나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생각만 하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도 이렇게 바뀌어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바뀌고 있을꺼라는 걸 알게 된다.

어제 희망버스에 친구들을 보내고,

마음을 졸이면서 아프리카 티비를 보고, 트윗을 보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함께 내려가지 않은 나를 고민했다.

다음에 3차 버스가 있다면 꼭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친구들이 걱정되어서" 이기도 했지만, "이 운동이 필요하고" "이러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함께 하는 사람이 더 많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뻔한 말이,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된다는 말이,

물방울 하나가 돌을 뚫는다는 말이....

명백한 진실임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2011/07/10 13:28 2011/07/10 13:28

아마도 이 집에 이사온 후 부터,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일지도 모르겠다.

뭐, 이유야 어쨌든지간에 요리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그 전에도 요리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해줘야 하는 상황보다 내가 받아먹는 상황이 더 많았다랄까? 그다지 요리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상황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땐 살림이나 요리에 관심도 없었을 때고...

아... 텃밭을 하면서, 그리고 최근에는 건강실천단을 하면서 요리를 좀 더 생각하게 된다.

내가 가지고 온 채소들을 꼭 다 내 손으로 해 먹고 싶은 욕구가 들고,

채식밖에 못하는 현재 상황에서 맛난 반찬을 먹고 싶기도 하고...

오늘은 우엉과 마늘과 사랑에 빠졌다.

우엉을 까고, 마늘을 까서 뭔가를 만드는 것은 그냥 푸른잎 채소를 데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더 공력이 들어간다랄까?

흐흐.. 그렇게 만든 음식은 늘 그렇듯 내 입에 쏙쏙!

이렇게 뭔가를 만드는게 신나는것이었는지 새삼 또 깨닫는다.

아아...좋구나.

2011/07/04 00:42 2011/07/04 00:42

요즘에는 나의 일의 스케쥴이나 컨디션 조절을 잘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막 활동을 시작하고 3년차쯤 되었을때는, 스케쥴 그런거 몰랐고, (상태도 별로였긴 했지만) 여튼 미친듯이 활동을 했었다. 하루에 회의 3개, 일주일 내내 스케쥴... 뭐 이런 식이었다랄까?

요즘 나의 일상은 주 3일 근무 + a / 나머지는 공부 + 휴식 + 관심가는 다른 활동이다.

말은 이렇지만, 여튼 목~일요일 까지는 조금은 여유롭다. "아주" 여유롭지 않은 이유는 가끔은 일주일 내내 스케쥴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

 물론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처음부터 반상근을 이야기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나는 지금 "논문학기중" 이기 때문이다. 목~일까지는 공부를 해야 하는 날인것이다.

흥! 하지만 일단 논문을 빼고 생각해볼테다.

논문을 다 쓴다고 해도, 현실이 허가한다면 이런 일상을 이어나가고 싶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주 3일 일하고 (물론 남은 요일에도 많이 회의나 행사에 나가게 되긴 한다) 나머지 날은 여유를 가지는 삶이 좋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충분한 휴식이 생긴다.

삶을 좀 더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몸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라는 것을 배워나가고 있다.

얼른 논문을 마치고 계속 이렇게 살 수 있는 현재를 가지고 나가고 싶다.

그러니 일단 논문 먼저!!!!

(아....이렇게 오늘도 논문 드립이로군 -ㅁ-)

2011/07/02 00:02 2011/07/02 00:02

오랫만에.

Diary/그밖의 2011/06/30 23:11
간만에 블로그에 들어왔다.

친구 O에게 블로그 주소를 알려준게 계기가 되었다랄까.

지난 몇달간, 아니 블로깅을 거의 하지 않고 살던 꽤 오랜 시간동안,

나는 그냥저냥 잘 지냈다.

뭔가 긴 글을, 내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졌다.

일과 관계된 글이 아니면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했고,

정히 너무 쓰고 싶은 글이 있었을때는 언니네 자방의 다락방에 적었다.

책도 사지 않았다.

소설도, 만화책도 거의 보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체벌같은 느낌이었다.

공부도 하지 않는, 논문도 쓰지 않는자는 다른 어떤 글을 쓸 자격도, 어떤 글을 읽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어야해! 라는 느낌이었다랄까....

어쨌든 다시 블로깅을 하기로 결심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너무 많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현재는, 마음은 가려지지 않는 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으쌰!

2011/06/30 23:11 2011/06/30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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