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좋은 기회로 쓰게 된 글이 드디어 나왔다. 사실 지금 일하는 곳에서 전에 했던 일들에 대해 말해본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는게 좀 부담이 되기도 했었는데... 그냥 뭐 어떠리.. 싶은 맘과 그래도 말해볼까? 싶은 맘.. 그리고 나도 뭔가 정리해보고 싶어! 라는 맘으로 쓰게 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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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닌 "모두 함께" 말하는 운동


캔디.D | (가)살림의료생협 활동가,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 당번

2011년 10월. 무슨 ‘활동가’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6년차. 한 곳에 진득하니 있지는 못했지만 점점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을 찾아가는 듯하다.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상근자로 시작하게 된 성소수자 운동은 성소수자의 인권과 관련된 환경이 얼마나 척박한가를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성전환자 성별변경 관련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가 꾸려지면서 우리가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점점 더 명확해져갔다. 지금 현실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필요를 충족해줄 수 있는 ‘법안’이었고, 법안을 만들기 위해 공동연대는 실태조사를 하고,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법안을 발의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가기 시작했다.

일련의 상황들을 겪어나가면서 트랜스젠더 인권 이슈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는 와중에 ‘트랜스젠더 인권활동단체 지렁이’(아래 ‘지렁이’)를 만났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들이 시작되었다.

지렁이는 활동가 위주의 단체였다. 활동가들이 모여 최근에 불거지는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진행해나가는 여타의 인권단체와 비슷한 형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신생단체였으니만큼 인원이 현저하게 적었다는 점? 혹은 활동가 대부분이 당사자였다는 점 정도?

지렁이 활동은 즐거웠고 행복했다. 트랜스젠더 단체가 딱히 없었던 만큼 함께 해야 할 것들도, 내/외부에서 목소리를 내야 할 일들도 많았다. 사무실도, 상근자도 없는 상황에서도 지렁이는 정말 열심히 많은 사업들을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나 개인의 고민이 커져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이 운동을 하는가?’에서 시작된 고민은 ‘왜 우리는 활동가 단체인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이 운동을 하고 있는가?’라는 것으로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인권운동이 차별 당사자 모두의 입맛에 맞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슈 파이팅이나 법안 운동을 하다보면 이론적인 논의 또한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발전들이 과히 달갑지 않았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운동은 젠더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많이 확장시켜나가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이 되면서 법안이나 사람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겨나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젠더와 수술, 법, 한국사회의 인식정도가 모두 다른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는 나에게 매우 당황스러웠다. 어떤 사람은 당연히 수술을 해야 성별 정정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사람은 수술이 꼭 중요한 것인지, 성기가 없으면 남자가 아닌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두 가지 다 중요하고 사람의 상황에 따라 주장할 수 있는 바가 매우 다르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운동은 특히나 당사자가 많이 나서지 못하는(또는 나서지 않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보다는 ‘다양한 젠더’에 대한 논의가 더 빨리 퍼져나갔다. 다양한 젠더에 관한 논의는 꼭 필요한 이야기였고 언젠가는 나왔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게 법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함께 나오기 시작한 것도 적당한 시점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내 맘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나에게 중심은 ‘당장 성별정정을 못해서 힘든 당사자’들이었지만, 내가 느끼기에 현재 인권운동에서의 중심은 점점 더 담론화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이것은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이들이 이론가-활동가이기도 했고, 당사자들의 경우도 당장의 좁은 현실보다는 큰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당사자가 아닌 나는 어떠한 목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전체 사안을 바라보고 모두의 의견을 합의시켜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책임의식에 시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당사자들을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 당사자들의 모임을 만들거나 거기 나가기도 해봤지만 그들이 활동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서비스만 제공하는 것 또한 우리가 하고자 했던 일이 아니라는 고민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의 내용을 다루지만 당사자가 부재하는 상황, 그리고 내가 당사자가 아닌 상황에서 하고 있는 인권운동은 나에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의 한계,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고민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3년차인 신생 단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한 번에 할 수 있고, 또 그런 아이디어와 여유를 가져올 수 있겠냐 싶지만 그때는 그 한계들로 인해 죽을 만큼 자존심이 상하고, 또 싫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한동안은 트랜스젠더의 T만 봐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인권운동, 성소수자 운동 다 좋지만 트랜스젠더 운동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지렁이는 요즘 뭐하냐고 묻는 것도 싫었고, 딱히 할 말이 없는 것도, 우리가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운동을 하고 싶었고, 운동을 하면서도 내 자존감이 손상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내 목소리를 내는 운동, 함께 가자고 하는 일이 어렵지 않은 운동을 하고 싶었다. 이런 나의 고민을 풀어준 것이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와 ‘(가)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이다. 이 두 단체는 지역과 당사자의 목소리를 함께 내면서 함께하는 운동을 나에게 제안해주었고, 나는 이 안에서 나의 갈증들을 조금씩 풀어나가고 있다.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동네에서 퀴어로 어떻게 살 것인가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아래 ‘마레연’)는 2010년 3월 마포에 거주하는 LGBTQ 활동가들이 모여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정치를 이야기하고, 퀴어를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마포레인보우 유권자연대’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마레연은 선거 기간에는 후보들에게 질의 등을 하면서 사업을 진행해 나갔고, 선거 이후에도 다양한 지역의 의제에 함께 해나갔다. 2010년 12월 마포레인보우 유권자연대는 전체모임을 통해 앞으로 마포 지역의 이야기를 함께하자고 결의하고 이름을 마포레인보우 주민연대로 바꾸고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마레연의 활동은 현재 다양한 마포 지역의 사안들(두리반, 강용석 의원 사퇴 촉구 등등)에 함께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역 주민들과 친목을 쌓아나가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마레연의 활동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내가 퀴어함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살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할 곳이 생겼다는 것이다. 지역사회, 동네에서 퀴어들은 비가시화되는 존재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퀴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퀴어 당사자들도 굳이 커밍아웃을 해서 불편함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포라는 지역을 보았을 때, 처음 모인 날 다섯 명의 활동가가 마포 지역에 사는 퀴어 친구들의 수를 100명을 채울 수 있었을 정도로 퀴어의 수가 많은 편이다.

물론 마포에 다른 퀴어 친목 모임들도 꽤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마레연이 다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친목모임과 더불어 그 모임 내에서 인권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매달 열리는 퀴어 밥상에서는 다 함께 만든 밥을 나눠먹으면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그즈음의 사안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두리반이나 포이동에 후원을 하는 일을 하거나 성미산과 관련한 직접적인 액션을 하기도 하고 희망버스를 함께 타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그냥 동네에서 술을 함께 마시면서 동네의 공동체를 좀 더 공고히 해나기기도 한다. 마레연은 마포라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내가 퀴어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모델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아직은 우리가 개개인의 동네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통반장이 되어서 동네의 일에 퀴어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까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을버스에 광고를 내고, 선거 때 적극적으로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등 하나하나씩 마을 주민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살림의료생협-지역과 여성주의의 만남

이렇게 당사자로서의 내가 마레연이라는 곳에서 적극적 주체가 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면, 나는 (가)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아래 ‘살림의료생협’)에서 활동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살림의료생협은 마레연보다는 좀 더 지역이라는 곳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게 된 곳이다. 살림의료생협은 은평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 사안에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가고, 의료 혹은 건강이라는 것 자체가 어떠한 특별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기도 하다.

살림의료생협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전에 다른 활동들을 할 때는 이슈 파이팅을 할 때도 거리의 무작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거나, 이 이슈를 개선시킬 수 있는 사람들(국회의원 같은?)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면 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 사람이 지역에서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나, 이 이슈 파이팅 이후 이 사람을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생협은 활동가라는 이름보다 조합원이라는 이름이 훨씬 크게 느껴지는 곳이고, 인권활동(!)이라는 거창한 제목보다는 소모임이나 조합원 모임이라는 소소한 느낌의 표현이 많아서 사람들이 덜 부담을 느끼게 되는 듯도 하다. ‘인권활동이 뭐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 거라고 사람들은 이렇게 선뜻 발을 못 떼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제목이 가지는 힘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똑같이 무상급식을 이야기해도, ‘학생들의 인권’이라는 말보다는 ‘내 아이 건강’이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살림의료생협은 여성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여성주의적 가치를 중요하게 가지고 가는 의료생협이다. 살림의료생협을 은평 지역에 만든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매우 당황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이 내면에는 내심 여성주의라는 것이 아직은 많은 이들이 반기는 주제가 아니고 어떤 한 축에서 하고 있는 활동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은평 지역에서 2년째를 보내고 있는 살림의료생협은 지금 꽤나 잘나가는 단체 중에 한곳이다. 처음 상근을 시작하면서 했던 고민이 ‘지역과 여성주의가 과연 맞닿을 수 있을 것인가?’였는데 지금 이 고민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 비혼이거나 ‘꼴페미’들만 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어떤 부분에서 부담스러웠을 여성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살림의료생협이 이야기하는 의료생협의 가치와 닿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몸으로 받아들여가고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에게 여성주의를 꼭 실천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비혼을 존중해야 한다고 교육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바뀌어 가고 있다. 처음에는 꼭 여성주의를 지향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성주의가 뭐야?”라며 불편함을 보이던 조합원들이 이제는 나서서 기초 여성주의 학교를 수강하기도 한다. 그 과정동안 우리는 우리를 많은 부분 있는 그대로 내보였고,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 지역에서 함께 하고 싶어 하고 함께 삶을 지내갈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줬을 뿐이다.

지렁이 활동을 할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지렁이 때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정성이 있음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꼈다면 지금은 지역이라는 든든한 기반이 있어서 일까? 내가 마음을 여는 만큼 사람들은 나를 믿어준다. 도리어 내가 이러한 그들의 열린 마음에 당황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나에게 이렇게 다가오는 걸까 고민을 할 정도이다.

마레연과 의료생협 활동을 하면서, 마음이 많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내가 어떤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고민하고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는 느낌이다. 나만이 주체가 아니라 모두가 주체가 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책임감이 커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이 이후엔 나나 우리가 아닌 또 다른 우리가 더 함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인에 마음이 좀 더 편해지기도 한다.

지역은 운동이 뻗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성소수자, 여성주의자, 비혼이라는 퀴어한 주제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서 이제까지는 진행하지 않았던 다른 비전을 고민하고 있다. 마레연은 내가 이 지역의 주민이라는 지역에 대한 소속감을 심어주면서 성소수자라는 위치와 더불어 나의 주거권이나, 이 지역에서 주민으로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살림의료생협에서는 지역에서 여성주의자로 커밍아웃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음을 알고 누구도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를 나에게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어떠한 운동이 더 옳거나 지향해야 하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며 고민하던 것, 혹은 한계를 느꼈던 것들이 지역이라는 테두리를 씌우면서부터 조금씩 해갈되어간다. 소위 말하는 일반 대중을 만나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었는데 ‘나 또한 일반 대중임을 잊고 지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아직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내가 성소수자라고 혹은 비혼이나 여성주의자라고 100% 커밍아웃을 하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한 작은 커밍아웃에도 반응하고 변화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언젠가는 내가 나를 다 보여준다고 할 때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이 변화될 수 있는 지역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소리 높여 설득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보고 느끼며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 사람에 대한 믿음을 좀 더 두텁게 할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내가 지역운동을 시작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2011/11/20 02:35 2011/11/20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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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라 2011/11/26 14:38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이 글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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