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워드 시즌 6

experienced 2009/01/29 19:37
The L Word

와우! 와우! 와우!!!

드디어 final season인 시즌6가 시작됐다.

2편까지 자막도 없는걸 다운 받아서 보는데, 진짜 감탄에 환호가 끊이지 않는다.

스포일러로 입은 간질거리고, 어디 말할 수도 없고..이런이런..

앞으로 몇달간은 매주 엘워드 보는 재미에 살겠지싶다.



2009/01/29 19:37 2009/01/2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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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비싼 돈을 주고 뮤지컬을 봤다.

My Fair Lady. 나한테는 꽤나 각별한 뮤지컬인데, 이걸 처음 본건 영국에 어학연수를 갔을때였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갔던 뮤지컬에 난 반해버렸고, 영화 DVD까지 사서 10번도 넘게 본 내가 꽤나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다.
 
그래서, 이 뮤지컬이 상영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달도 넘게 전에 거금을 주고 예매를 했었다.

하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대 실망.

이 작품은 철저히 영국의 배경, 아니 영어라는 언어가 있어야 진행이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다. 촌스럽고 엉터리 말투를 구사하는 일라이자를 언어학자 히긴스가 데려다가 요조숙녀로 만든 후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가진 이 작품은, 처음 그녀의 말투와 나중의 그녀의 말투를 비교하는 것이 꽤나 재미있는 부분이다.

"The rain in Spain falls mainly in the plain"
"In Hartford, Hereford, and Hampshire Hurricanes hardly happen."
과 같은 발음을 익히는 과정이라던가,

"How kind of you to let me come"
"How do you do"
등을 고급스럽게(?) 말하는 방법등을 익히는 모습이나 끊임없이 반복하는 모습이 꽤나 나에게는 묘미였기 때문에, 이걸 한국식으로 어떻게 바꿔갔을지가 나한테는 큰 관심사였다.

그런데, 저걸 한국말로 그대로 번역해서 말을 하고(스페인에는 비가...), how do you do나 how kind you to let me come 같은 경우는 아예 그대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물론, 사투리를 비하하는 발언들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파장을 일으키는 지는 알고 있지만 차라리 사투리를 잔뜩 사용하는 그녀가 표준어를 구사하게 하는 것이 더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에서의 My Fair Lady는 그저 영화와 뮤지컬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한국말로 옮기기만 한 것일뿐 관객들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뮤지컬이었다. 그들의 엄청난 가창력과, 안무, 연기같은건 하나의 기술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걸까...한동안은 맘에 드는 뮤지컬이 있어도 보러가는걸 망설이게 될 듯 하다.

사족. 사실 마이페어레이디의 내용은 그다지 맘에 많이 드는 것은 아니다. 6개월만 키우면 귀부인으로 만들 수 있다느니, 그걸 가지고 내기를 한다느니 하는 것도 짜증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멋진 노래들과, 언어를 익히는 일라이자의 모습은 꽤나 매력적이니 안볼 수가 없게 된다.

2008/08/29 00:26 2008/08/29 00:26

할일없이 뒹굴거리다가 불여우를 다시 깔았다.
2년만인가? 전에는 곧잘 썼었는데, 한번 컴퓨터를 밀고 난 후에 계속 익스플로러를 썼댔다.

뭐...다시 이것저것 손대기 시작한 것이 놀고 싶은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윈도우 꾸미기. 별건 아니고, 글씨체랑, 창색깔같은걸 바꾸고 있다.
왜 맨밑의 메뉴바 색깔은 안바꿔지는지 고민중.
아이콘도 다 바꿔버릴까...





2008/08/18 01:13 2008/08/18 01:13

자전거 지르다

experienced 2008/08/07 00:30
몇달에 걸친 고민 끝에 드디어 자전거를 질렀다 >ㅁ<

전부터 찍어놓은 미니멜로 망고색.

사실은 여전히 스쿠터의 욕구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들(=돈?)을 생각하여..겸사겸사 드디어...

요즘은 평일이 좀 바빠서, 사실 자전거를 사러 갈 시간이 없었는데,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ㅎㄹ이랑 같이 광흥창으로 자전거를 사러 고고씽.

 자전거는 잘 샀으나, 5시 반 약속인데 시간은 어느새 5시 반이고 자전거를 타고 말고 할 시간조차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는데, 이것부터 문제는 시작!

 택시에 타야하는 자전거는 총2대. 사람도 2명. 한대는 ㅎㄹ의 접이식 자전거이고 내껀 미니벨로이긴 하지만 접이식은 아니고...어찌어찌 아저씨가 태워는 주셨는데, ㅎㄹ꺼는 있는대로 접어서 트렁크로, 내꺼는 트렁크에 넣는 것을 실패하고 나와 같이 뒷자석에 안착.
광화문에 도착해서 드디어 시승식을 해야지! 라며 즐거워 했던 것도 잠시. 자전거가 헛발질을 하는것 아닌가! 살펴보니 심하게 구겨 넣은 후유증인지 체인이 빠져 있었다. ....산지 삼십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전거 샵에 전화하고, 친구한테 문의를 하고 쌩 난리를 친 후에서야 체인을 잘 끼워넣을 수 있었다. 여기서 한 숨 또 돌리고...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가야 하는데, 오늘 컨디션에 광화문-망원까지 자전거를 타기는 무리라고 판단해서 2호선을 타고 합정까지 오기로 결정을 했다. 시청역으로 갔는데....엘레베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또 왠 날벼락! 그래서 을지로 입구로 가기로 하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지만....달리면서 생각해보니 이쪽으로 가면 서울역...

 그래서 결국은 남대문쪽으로 돌고돌아서 을지로 입구역에 도착했다. 역시...엘리베이터는 보이지 않았다...영차영차 자전거를 들고 내려갔는데, 역무원 아저씨가 '자전거는 원래 지하철을 타면 안된다'는 말을 하시는 것 아닌가! 또 한번 좌절...
 뭐, 일단 그 상황에서는 다시 올라갈 선택의 여지따윈 모른 척 하고, 안면몰수하고 지하철을 탔다. 나름 사람도 좀 있었는데, 심히 죄송스럽고 민망하던 마음이 온몸을 휘감아 왔으나, 패스...

그렇게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후 자전거와 함께 집에 도착했다. 1층 마당에 세워놓을까 하다가, 도난이 두려워지며(내 자전거가 좀 이쁘단 말이지!!!) 또 열심히 들고 집까지 올라왔다. 우후훗!

이제부터 미친듯이 타주겠노라 자전거여! 나와 함께 남은 여름을 불살라보자꾸나! 불끈!
2008/08/07 00:30 2008/08/07 00:30

타로의 조언.

experienced 2008/07/23 10:56

안경을 찾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ㄹㅅ님에게 타로를 봤다.

전반적인 내용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ㄹㅅ님이 보고 싶은걸 다 보라고 해서 이것저것 다 이야기를 나누고...
연애, 활동, 학업, 돈- (필요한건 다 이야기 해본...)

늘 타로를 볼 때마다 그렇지만, 꽤나 인상적인 타로의 내용들에 깜짝깜짝 놀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번 타로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건 약간의 다행스러움과 좌절감?
'역시 그렇군' 이라는 생각?

하나도 포기 하지 말라했다. 모든 것을 사랑하며, 다 해내라고,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타로는 계속해서 쏟아 내었다.

사실 은근 기뻤다랄까? 지금의 상황에서, 뭐 하나를 포기하라는 말이 나왔다면 결국 그래야 하나? 라고 생각하며 더 고민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더 열심히 하라고 하니- 그냔 난 잘 하면 되는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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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많이 나온 카드가 저 king of wands

의존을 버리고, 벌떡 일어날 수 있기를.

그래서 그냥 '나'로 당당히 설수 있기를.









2008/07/23 10:56 2008/07/23 10:56

인권단체연석회의의 모 활동가가 다쳐서 같이 국립의료원에 다녀왔다.

두어시간을 머무는 동안, 집회장소에서보다 더 많은 한숨을 쉬고 나온 것 같다.

이 활동가 친구는 인권침해 감시단 조끼를 입고 있었다.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고, 엄청난 폭력 진압을 보고 때리지 말라는 말을 외치고 있었는데, 순간 곤봉이 그녀의 등을 후려쳤다고 한다. 그 옆에 있던 다른 활동가 한명도 곤봉으로 맞았단다. 친구는 등에 타박상, 그리고 다른 활동가 한명은 팔에 금이 가서 기브스를 했다.

그녀와 함께 간 국립의료원의 상황도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경찰의 방패에 맞은 사람, 경찰이 던진 쇳덩이에 맞은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서 반창고를 붙이고,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연락을 해본 백병원만 해도 60여명, 국립의료원도 30여명, 그리고 다른 병원들... 돌아간 사람들과, 병원에 오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100명을 훌쩍 넘겨버린 숫자가 폭력진압에 무참히 밟혔다.

하지만 무엇보다 분노를 금할 수 없었던건,

무차별 폭행의 끝장. 의료진의 폭행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한분은 현장에서 의료진으로 활동하고 계셨던 분이란다. 진료를 하고 있던 도중, 전경에게 맞았고, 심지어 그 분이 진료하고 있던 사람은 전경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할짓인가. 그들이 사람인가.
여기저기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말이라 수술도 하지 못해서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게 되더라..

집으로....도저히 돌아올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다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이명박과 어청수 그리고 경찰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언제까지 이럴텐가, 이런식으로 누르다 보면 끝날것이라고 생각하는건가?

무슨 전쟁터에서 폭격을 맞은 사람들마냥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다치고 치료를 받고서도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오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서, 그래도 웃으면서 끝까지 해야하지 않겠냐고 하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 수 밖에 없었다.

똑똑히 봐라. 이것이 너희들의 결과이고 너희들이 말하는 해결인것인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얼마나 더 많은 촛불이 올라와야 알 것인가.
말 뿐인 고개숙임, 계속되는 거짓.
답답하고 답답하다.


2008/06/29 08:20 2008/06/29 08:20

집회 단상.

experienced 2008/06/10 02:12
생각해보니, 집회에 관한 내 첫 기억은 불타는 집과, 매캐한 연기이다.

 자라온 지역의 특성상, 그리고 그당시 대학교 앞이라는 우리집 위치의 특성상, 초등학교때부터 집회/시위/데모(어떤 단어가 적절한건지 모르겠다)를 꽤 많이 봐 왔었다. 국민학생이었던 우리들의 필수품은 물에 적신 손수건이었고, 콜록거리면서도 옥상에 올라가서 그들을 바라보기도 했던 것 같다.
 
사실 언제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날도 살벌한 시위가 한창이었고, 때마침 아파트 옥상에 올라간 나에게 보였던 광경은 근처 집의 지붕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정확한 기억인지도 이제는 확실하지 않지만, 화염병을 맞고 타고 있던걸 분명 본게 아닐까...한다.
 
 그래서 였을까? 수 많은 시위 참여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학교 다닐때의 나는, 단 한번도 외부 집회에 참여를 해 본 적이 없다.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또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불심검문을 하는 경찰을 보면서 '정말 저게 합법적인걸까?' 라는 생각을 했던 정도?

하지만, 늘 알 수 없는 부채감은 나를 감싸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심하게 내 가슴을 덮었던 때가 상암 홈에버사태때 였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들어가지 않은 나에 대한 죄책감은 온몸을 훑고 지나갔고, 아마도 그때...다음에는 꼭 가겠노라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사실은 두려웠다. 티비에는 온통 무서운 이야기 뿐이고, 주위에는 연행되는 사람들과 다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급기야 동생은 며칠전에 연락두절... 혼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가야한다. 가고싶다와는 또 다른 "무섭다"라는 감정. 그리고 스스로의 비겁함에 느껴지는 자괴감.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 생중계를 보다가 더이상 안되겠다 싶어서 첫 광화문 진출을 결심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같이 갈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혼자 간다는게, (가면 아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 뻔함에도..) 가서 무슨일이 생기면 나를 챙겨줄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게 나를 공포감으로 몰아넣었었다.

그렇게 참여한 첫 촛불집회 참여. 무지개 깃발 아래 함께 서서 구호를 외치고, 같이 분노했다. 그들이 간 뒤에도 차마 나는 돌아갈 수 없어, 거리를 서성이고 다시 또 아는 사람들을 찾아 헤매였다.  그렇게 만난 활동가 M과 A. 아침까지 그들과 함께하며 이야기도 나누고 같이 걱정도 하고.... 그렇게 12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무서웠지만, 다녀오길 잘 했다 싶다. 경찰이 눈앞에서 뛰어올때는 정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다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아파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이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아름다웠던 공간이었다.
유쾌하게 나를 웃게 해준 A, 그리고 계속 담담한 모습을 보여줬던 M.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만났던 많은 활동가 친구들. 며칠밤을 새고 피곤이 가득한 모습에도 눈만은 반짝이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들 뿐이 아니지... 어디선가 계속 나타나는 먹을 것들. 가방에 들어가 있던 작은 비타민 과자도 나눠먹는 사람들, 새벽에 나타난 한약과 낮에 나타난 일사병 방지용 반팔티. 아낌없는 나눔의 모습도 감동이었고...
거리낌없니 나와 자신을 이야기 하던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나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주고 있는 집회이지만, 나는 내일 다시 거리로 나선다. 이미 내 마음에서부터, 거리 한켠에서부터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2008/06/10 02:12 2008/06/10 02:12

우피스매냐를 끊어서 미친듯이 보았던 여성영화제가 드디어 끝났다.

원래는 총 17편을 생각했었는데, 결국 본 건 10편정도.-ㅁ- 내년엔 욕심을 버려야 겠다.

본 영화들은

4/11 날아간 뻥튀기/주디스 버틀러: 제 삼의 철학
4/12 3*FTM
4/13 이티비티티티위원회/소녀들의 크레이지 카메라(널 / 레즈비언 파이터 / 색안경을 벗어라 /지수의 성에 관한 보고서 / 엄마, 울지마 / 38호 / 인형)/여자를 사랑한 트랜스젠더/오버더 레즈보우(웬 멋진 남자? / 공원, 꽃, 그리고 첫키스 / 서큐버스 / 브루클린과 조르단 / 지붕 위의 세상 / 가족에게 커밍아웃하는 다양한 방법 /Keep Walking)
4/14 그가사는법/잔인하고 비정상적인/부치 제이미
4/15 에이미 스토리/퀴어스폰:퀴어의 아이들/우린 레즈비언이잖아
4/17 3*FTM(GV만)
4/18 XXY

하나하나 코멘트를 하고 싶지만, (몇개는 하기도 했고..) 일단 조금 미뤄두고...

가끔은 책 판매(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언니네 태그놀이)도 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잡담도 하고, 좋은 분들과 회도 먹고(무려 두번이나!), 참 좋은 분과는 아웃백도 갔다. >ㅁ<

그 와중에 쪽글도 한개 내고, 어리버리 발제도 하나 하고...

이제 나에겐 3권의 책과 화요일 발제가 남았다 OTL

달리자아아
2008/04/20 03:05 2008/04/20 03:05

민주노동당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하는 순간, 사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민주노동당은 어쩌면 나에게 큰 의미를 지닌 곳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치적인 의미를 떠나서 나에게 큰 의미를 지닌 곳이 "맞다".

처음 소위 말하는 "활동판"이라는 것에 들어가게 된 것이 민주노동당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놀고 있었던 때였고, 때마침 올라온 성소수자위원회 상근자 공고에 떡하니 눈이 홀린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름 몇대 몇의 경쟁률을 뚫고 이름만 들어본 '민주노동당' 그것도 '중앙당'의 일원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걱정이 대단했다. 나의 정치적 성향에 맞는지를 다시 묻는 사람도 있었고, 절대 데모는 하면 안된다고 못을 박던 외할머니도 있었다.그렇게 난 당의 색깔이나 정책하나도 나는 모르고 당에 입당을 하게되었다. 그저 '성소수자로서 행복하고 싶어서'였다.

행복하고 싶어서 시작했고,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미련없이 당을 떠나왔다.

많은 일을 겪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내 인생에 중요한 인물이 되고 있는, 그리고 될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해준곳이 성소수자위원회였다.
정치판이라는 곳에 관심을 갖게 해준 곳도 민노당이었고, 정치판이 더럽다고 생각하게 해준곳도 민노당이었다.
어쩌면, 이건 '당'을 생각하지 못하고 '위원회'만을 먼저 생각했던 내 문제가 더 큰것일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싸우는 모습을 봐야했고, 불합리한 구조에 '할 수 없이' 승복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봐야 했으며, 하고싶지 않은 일들도, 동의하지 못하겠는 일들도 '당직자'였기 때문에 해야만 했다.

2006년 7월에 시작한 나의 성소수자위원회 생활은 1년을 채 못채우고 2007년 4월에 끝이 났다.

어떤 한가지 이유때문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이 문제였는지, 위원회가 문제였는지, 사람들과의 관계가 문제였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온 후,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나를 키워준 곳일 수도 있는 성소수자위원회에도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만큼 난 1년여만에 지쳐있었다. 공동연대라고 만들어진 테이블에 이름만 걸어놓고 나몰라라 하는 사람들에도 질렸었고, 정치인이라고 얼굴마담 몇번 한것으로 생색내는 의원들한테도 질려있었고, 허구헌날 싸움질에 뒷다마질인 파벌을 보는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당직자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여러가지 일들. 지금보다 더 미숙했던 내가 감당해낼 수 없었던 권위적인 감정의 폭력들. 계속해서 밀리는 월급과, 카드 돌려막기로 어떻게든 버텨내보려고 애를 쓰던 다른 당직자들도, 그리고 그걸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고 말하던 무책임한 사람들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떠나온 후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다른 거처를 찾았고, 선거철을 맞으면서 조금씩 당을, 성소수자위원회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견뎌낼 수 없었던 것들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불합리에 견디지 못하고 당을 그만둔 사람들, 혹은 다른 당을 만들어간 사람들. 그들도 각자 행복을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해 가고 있는 것을 이제는 볼 수 있다.

내가 옳았느냐라고 묻는다면, 틀리진 않았다고 말을 할게다. 나도, 행복하고 싶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어디든 누구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는, 어디도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은 떨어진 시선으로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정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뭔가 센치해진 밤. 과거를 돌아보다.
2008/04/08 00:26 2008/04/08 00:26

Facebook

experienced 2008/04/07 02:55
웹 검색을 하다가 Facebook 이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일종의 싸이월드와 비슷한 커뮤니티 웹사이트인데, 아무 생각없이 가입했다가 예전에 영국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시 찾게 되면서 혼자 신나하는 중.
친구의 친구보기를 통해서, 그리고 친구가 가입한 그룹보기를 통해서 벌써 11명의 친구와 링크가 되었다. 신기한고로!

새삼 다시 느끼는 거지만, 나는 유난히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지속적인 연결을 맺기를 원한다. 심지어 예전에는 엄청엄청 나쁜 사건이 있었던 사람과도 '뭔가 나중에라도 필요할꺼야'라는 생각으로 연락을 지속한 적이 있었으니 할말 다 한 셈이다.

여튼 facebook으로 돌아가서,

신기하다. 싸이월드와 별다를 것 없는 사이트임에도, 외국에 사는 외국 친구들 - 나라도 콜롬비아, 일본, 홍콩, 시리아, 스위스 등 다양하기 그지 없다 -을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때문에 더욱 신기함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문제라면 역시 영어라는거.
그다지 잘하는 영어도 아니었지만, 어찌나 오래 손을 놓았던지 까만게 글씨인것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겠다.
이번 계기로 어쩌면 영어 공부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게 될지도.

아직, 자세한 기능을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싸이와 비슷하게 사는 지역, 학교등으로 검색을 해서 사람을 찾는 기능도 있는것 같고, MSN과 연동해서 친구를 초대하는 기능도 있는 듯 하다. 관심사에 따라서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것도 같으니, 꽤나 괜찮은 듯 하다. 게다가 찾아보니 바이에 관한 커뮤니티도 잔뜩!!

뭔가 괜찮은 자료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당분간은 좀 더 구경해봐야겠다. ^-^


2008/04/07 02:55 2008/04/07 02:55